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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페미니즘

원제:One-Dimensional Woman 일차원적 여성     
니나 파워​(지은이) 김성준(옮긴이) 미셸 퍼거슨(해설)

 

“이 책을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논쟁적 저작들보다 높은 수준에 위치하도록 만드는 것은 파워가 보여주는 이론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철학과 교수라는 걸 보고 이 책이 지나치게 학술적이라고 불평할 것이다. 하지만 파워에게 비판이론은 다양한 페미니즘 논쟁들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에서 파워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매혹적인 계보학을 선보인다. 성평등에 대한 많은 주류적 논쟁들은 지루하고 단순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내가 파워의 책에 경의를 표하는 이유다. 이 책은 당신을 사유하게 만든다.”
_ 『가디언』, 2010년 1월 10일
“월가 점령 운동이 우리에게 준 ‘1퍼센트’라는 유명한 표현은,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서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믿었던 2009년의 평균적인 미국 페미니스트나 영국의 페미니스트에게 아직 활용 가능한 어휘가 아니었다. …… 이 책은 2009년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목소리를 제공해 주었다.”
_ 미셸 퍼거슨 (콜로라도대 정치학과 교수), 한국어판 해설
 
“니나 파워의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에 (쇼핑과 출세 사이의) 단순한 양자택일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음을 반갑게 상기시켜 주는 책이다. 당신의 피를 끓게 만들 재밌는 읽을거리.”
_ 『뉴 스테이츠맨』, 2009년 올해의 책.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에 대한 최근의 책들 중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_ 시안 루딕, 『국제 사회주의』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노동과 섹스, 정치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에 흥미로운 기여를 하고 있다. 인상적일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페미니스트들의 포르노그래피 논쟁이 가진 비역사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절이다.”
_ 재키 프리먼, 『사회주의자 리뷰』
“분노가 이렇게 재기발랄한 경우는 드물다. 재기발랄함이 이렇게 분노해 있는 경우도 드물다. 또한 재기발랄함이나 분노가 이렇게나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경우도 드물다. 매우 효과가 뛰어난 각성제 한 첩.”
_ 차이나 미에빌, 소설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백래시』 이후의 페미니즘 전쟁

2009년에 출간된 파워의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미국과 영국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책이다. 비록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이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을 둘러싼 인간 조건의 위기와 정치적 가능성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처한 위기가 어떻게 맞물리는가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은 반동세력이 진보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진영 싸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레이건과 대처의 보수화 바람을 타고 반동세력은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룬 성취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자 했다. 얼마 전 국내에도 소개된 『백래시』에서 수전 팔루디가 상세하게 묘사했듯이, 학자와 언론인, 의사들이 합세한 여성들에 대한 공격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며, 출산율이 저조한 것은 여성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고, 아이들이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들이 이기적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로 무장한 반反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자상한 엄마나 순종적인 아내의 역할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기점으로 페미니즘을 둘러싼 전쟁의 양상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블레어와 클린턴이 대변했던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시대정신은 비록 노동이나 경제적 불평등 문제의 해결은 차후로 미뤄두었지만, 다양성과 여성 인권, 다문화주의는 전향적으로 끌어안았다. 덕분에 성 정체성/지향이나 인종, 출신 등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발상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상식과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에 발맞추어 점차 공적인 토론장이나 미디어에서 노골적으로 차별을 부추기는 혐오표현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비차별주의와 다양성에 대한 포용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성차별주의자들이나 인종주의자들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의 적들에게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제 공론장에서 패색이 짙어졌다고 판단한 적들은 무조건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대신에, 페미니즘의 언어를 훔쳐서 자기 것으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 파워의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이 새로운 전략이 본격화되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를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누가 페미니즘을 훔쳤나

페미니즘의 언어를 누군가가 훔쳤다면, 도대체 누가 도둑인가? 파워의 주장에 따르면, 도둑은 한둘이 아니고, 도둑질의 방식도 제각각이다. 안타깝게도 이 새로운 싸움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조차 여성의 편이 아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첫 번째 도둑은 군사주의 매파들이다. 2000년대 초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할 때, 이들은 매스꺼울 정도로 감상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의 언어를 소환해 왔다. 느닷없이 페미니스트 투사로 거듭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주요인사들은 ‘탈레반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손톱을 뽑혀가며 신음하는 중동의 여성들을 외면할건가!’라고 외치면서 전쟁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부시는 낙태정책을 지원하는 국제가족계획단체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는 것도 거부했다.

두 번째 도둑은 오로지 여성을 권력의 최상층에 올리는 것만이 여성해방의 길이라고 외치는 언론과 미디어다. 이들은 여성의 실질적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차별과 억압의 근본적인 구조를 변화시키는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현존하는 위계제 안에서 권력의 상층부에 오른 여성에게만 주목한다. 하지만 마가릿 대처나 콘돌리자 라이스가 그러했듯이, 이들은 때때로 다른 여성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정책의 집행자가 여성 지도자였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여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대책은 무엇인가’라는 구조에 대한 질문은 ‘고위직에 몇 퍼센트의 여성이 있는가’라는 대표에 대한 질문으로 손쉽게 환원될 수 있다. 기업의 여성임원이나 여성고위공무원, 여성정치인은 이제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그 자신들이 차지한 지위에 따라서만 평가될 것이다. ‘과연 고위직에 진출한 여성으로 인해 평범한 여성들의 삶이 더 나아졌는가’라는 질문은 효과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책이 고발하는 세 번째 도둑은 여성에 대한 유연한 착취를 마치 여성해방의 주요한 성과라도 되는 양 포장하는 현대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멋지게 차려입은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이미지를 내세우며 자기정당화를 꾀한다. 여전히 여자들이 남자들에 박봉의 질 낮은 일자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구조적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선택에 따라 감수해야 할 개인의 문제로 이해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부담도 여전히 여성에게 맡겨지지만, 그로 인해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고용 상의 불이익은 개개인이 책임져야 할 선택의 결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과거까지 여성노동만의 특징이었던 고용의 불안정성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모두의 노동을 ‘여성화’시켜버린 노동시장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속속들이 자본화함으로써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이력서’로 빚어낼 것을 강요한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광고해야 한다. 신체적 외양이나 태도 같은 개인적인 영역은 물론이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인간관계마저 빈틈없이 관리하면서, 자신이 언제나 준비된 노동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는 전문직 여성이 현대 노동자와 여성해방의 모범적 표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면 뒤에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임신이나 가정에서의 문제로 고용주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임시직 여성노동자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네 번째 도둑은 여성의 해방이란 오로지 더 많은 상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소비자 페미니즘’이다.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특히 성공을 거둔 이 부류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라는 억압의 구조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도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고 광고한다. 소비자 페미니즘은 한때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억압을 극복하려는 집단적 노력이었을 페미니즘을, 현대 자본주의가 모범으로 여길 만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공의 이상으로 교체하고자 한다. 소비자 페미니즘의 새로운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란 자신의 능력과 매력을 믿고 성공적으로 경력을 개발하고 이끌어가는 여성이며, 그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원하는 재화들을 아낌없이 구매함으로써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여성이다. 그동안 “가부장제를 처부수자” 같은 한때는 급진적이었을 페미니즘의 구호는 분홍색 티셔츠나 배지, 에코백 등에 새겨져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목록에 오른다. 이제는 자기계발서가 되어 버린 페미니즘 도서와 함께 이 상품들은 행복한 쇼핑천국의 거주자들에게 호소할 것이다.

 

일차원적 페미니즘을 넘어서

요컨대 파워에 따르면,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고, 노동시장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착취를 은폐하기 위해 활용된다. 자기효능감을 증진시키는 패션아이템이나 화장품, 성형수술 기법을 광고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남성중심적 조직문화 안에서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여성 지도자나 기업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데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이제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더 이상 남자들이나 기득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가디언』지의 편집장 캐서린 바이너가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은 이제 참된 평등을 위한 싸움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위해 활용된다.” 파워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떠한 체계적인 정치적 사유에도 착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한다.

파워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하지 않고 여성 개개인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은 ‘일차원적’인 것에 그친다고 주장한다. 물론 현존하는 구조적 억압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서도 여성이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한 여성의 자발적 선택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에는 적지 않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워가 볼 때 오늘날의 일차원적 페미니즘의 문제는, 그러한 작업에 만족한 채 더 이상 문제의식을 진전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차원적 인간』의 저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 개개인이 “자신에게 부과된 필요를 자발적으로 재생산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개인의 자율성이나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체계가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들이 여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선택된다는 사실은, “개인의 자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통제의 유효성”을 증언한다. 파워는 페미니즘이 어떻게 하면 지금의 ‘일차원성’을 벗어던지고, 제국주의와 소비주의라는 도둑들로부터 자신의 위대한 가능성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2009년의 영국과 미국, 그리고 2018년의 한국

과연 2000년대 초반의 영국과 미국사회에 대한 분석을 담은 이 책의 문제의식이, 출간된 지 십 년 가까이 지난 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까? 파워가 묘사했던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은 2018년에 보다 심화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그녀의 비평이 지닌 놀라운 장점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페미니즘이 직면할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여러 핵심적 논점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서 탄핵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페미니즘이 경험한 가장 황당한 도둑질의 사례들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박근혜를 당선으로 이끌기까지 그녀의 인기를 뒷받침했던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전근대적 군주에 대한 향수였다. 그녀의 당선과 페미니즘 정치의 성취는 전혀 무관했다. 하지만 탄핵의 과정에서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유독 부각됐다.우리는 촛불시위라는 위대한 저항이 이끈 헌정 사상 초유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탄핵의 과정에서, 한 번도 ‘여성’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는 한 우파 정치인의 몰락이 ‘여성 정치’를 탄핵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반동적 흐름을 목격했다.

같은 기간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적 가치를 표방하는 여초 커뮤니티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페미니즘 서적 출판이나 페미니즘 연구소 후원, 티셔츠 판매 등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이 연이어 성사되었다. 또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공유되던 성폭력 피해여성들의 경험담은 여성들 간의 연대의식을 구축하면서 최근의 미투 운동으로 이어지는 주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들이 높아지면서 여러 페미니즘 서적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낙태죄 폐지와 차별금지법 입법 같은 중요한 의제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박근혜를 파면하고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급기야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꽤 포괄적인 여성 정책 패키지를 내놓기도 했다. 얼핏 한국은 미국의 1970년대와 비견할 만한 페미니즘의 대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본다면 상황이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여성계의 요구에 그리 잘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저서에서 저열한 젠더 의식을 드러낸 탁현민 행정관을 끝끝내 감싸는 한편, 낙태죄의 폐지나 차별금지법 도입에 대해서 계속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대선 후보 때부터 젠더 이슈에 대한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을 계속해서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급기야 ‘성평등이냐 양성평등이냐’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를 놓고, 여성부 장관이 보수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을 방문해 해명하는 굴욕적인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했다. 외교부와 고용노동부, 환경부, 보훈처 등의 수장을 여성으로 임명한 것은 일견 진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재인 정부가 표방하는 페미니즘은 보다 많은 여성을 고위직에 배치하겠다는 제한적인 약속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전략이 2000년대 초반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처럼 페미니즘의 언어를 훔쳐서 스스로를 진보적인 이미지로 꾸며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1980년대의 백래시나 2010년대의 포퓰리즘을 연상시키는 흐름도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반反페미니즘을 주도하는 세력이 대체로 우파였다면, 한국에서는 그러한 흐름에 좌우가 없다는 게 특징적이다. ‘나는 꼼수다’라는 영향력 있는 팟캐스트의 진행자였던 김어준 씨는 진보 인사들을 공격하려는 극우세력의 공작에 의해 미투 운동이 왜곡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현 정부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어렵게 말할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성주의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당론으로 하고 있는 정의당이라고 해서 별반 사정이 낫지는 않다. 당원게시판에는 오늘도 여성주의 당론에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이나 당내 성폭력 사건에 2차 가해를 일삼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다.

페미니즘 붐의 출발점이 되었던 온라인 커뮤니티들과 SNS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 온라인의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차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일간베스트’나 ‘오늘의유머’ 같은 남초 커뮤니티는 여전히 건재한 반면에, 안타깝게도 페미니즘 붐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범 메갈리아 커뮤니티들과 페이지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당시에 등장한 수많은 대안적 커뮤니티 중에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하필이면 성소수자 혐오적 진술에 대한 동의 여부를 가입요건으로 내거는 ‘워마드’다. 워마드의 일부 회원들은 영미권의 근본주의적 페미니즘을 수입하면서 성소수자 혐오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정당화를 꾀하는 한편, 출판사업 등을 통해 오프라인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재급진화를 위하여

이처럼 페미니즘은 한국의 이념지형을 급격하게 재편하고 있다. 이 재편과정의 한 축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 없이도 (심지어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무시하고도) 보편적인 인간해방이나 완전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자칭 진보/좌파들이 있다. 다른 한 축에는 자본주의나 보다 구조적인 억압의 문제에 대한 관심 없이 개별적인 여성 의제만을 내세워서 여성해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두 축이 만나지 못한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

우선 페미니즘 없이 보편적인 인간해방은 없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보편적인 인간해방이라는 대과제 앞에 연대해야 할 특수한 한 분과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 문제에 대한 고려 없는 기존의 해방에 대한 논의들이야말로 특수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인간해방을 주장하는 진보 이론들 중에서 그저 특수한 한 분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향하는 기존의 해방적 정치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이론을 더욱 보편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고 완성해내기 위해서 불가결한 시각이다. 파워가 쓰고 있듯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없이 설명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그 관점을 누락한 진보는 반쪽짜리 진보를 넘어설 수 없다.

한편 파워는 소비자 페미니즘의 기대와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여성을 해방시켜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오래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의존하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구조적 억압을 지금의 형태로 재생산하고 유지하려고 한다. 파워가 지적하듯이 “페미니즘의 가장 영속적인 성취 중 하나는 가사노동과 재생산 노동, 임금노동 사이의 연결고리를 재정립했다는” 데 있다. 어떻게 스스로의 노동력을 내다팔기에 충분한 체력과 기능을 확보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노동시장에 공급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가 그들을 낳고 기르고 보살피는 여성의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한때 ‘급진적’이었다면, 오로지 페미니즘만이 가부장제적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의존하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가정과 정치, 성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의 연결고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말미에서 파워가 급진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을 인용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급진 페미니즘의 목표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던 남성중심적이고 여성배제적인 좌파를 진정으로 급진화하는 것이었다. 파이어스톤은 급진 페미니즘의 정치적 목표를 묘사하는 데 “만약 혁명보다 포괄적인 말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 바 있다. 파워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파워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기획은 ‘이념 없이 살라’는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책의 한국어판에는 저자 니나 파워의 새로운 서문과 미국의 정치학자 미셸 퍼거슨의 해설이 추가됐다. 유럽의 맑스주의 전통에 속한 영국 페미니스트 파워의 현 정세에 대한 진단과, 급진적 민주주의 전통에 입각한 미국 페미니스트 퍼거슨의 비판을 대비해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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