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테의 파우스트 1 / 비극적 형식에 대한 성찰 (주제들 7)
데이비드 E. 웰버리 (지은이) I 이강진 (옮긴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자아는 무한으로 향하는 그의 유한성이자, 유한으로 향하게 되는 그의 무한성이다.”
독일 문학을 변방의 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끌어올렸다는 문호 괴테가 작가로서의 거의 전 생애에 해당하는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파우스트』. 한국에도 일찌감치 1, 2부가 번역되어 ‘필독 고전’이 되었음에도 단편적인 작품 해설을 넘어 괴테 문학의 총체를 관통하는 해석이 부재한 까닭에 복잡한 구성을 가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아직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없었지만―독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E. 웰버리의 『괴테의 파우스트 1 / 비극적 형식에 대한 성찰』을 읽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고전 이해에 의미 있는 자양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웰버리는 『파우스트』를 ‘비극’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전제할 뿐 아니라, 비극이라는 장르의 역사에 등장한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한다. 『파우스트』의 원래 제목이 『파우스트, 한 편의 비극(Faust, eine Tragödie)』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는 당연한 전제의 반복처럼 들리지만, 그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여 그간 이 ‘비극’에 대한 해석이 지닌 한계와 오류를 짚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괴테의 『파우스트』가 근대를 살아가는 인간 주체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비극을 해명한 치열한 성찰의 소산이었음을 명징하게 설명해 준다. 이 작은 강연 텍스트에서 고전 비평의 한 전범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출생에서부터 83세에 이르는 괴테의 인생행로를 엿보게 되면, 어떤 전기의 제목처럼 그의 생애 자체가 그대로 “예술작품 같은 삶”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하는 삶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까지만 다가간다면 괴테와 그의 작품들은 화려한 운명과 천재성이 만나 가능했던 사례로서 경외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예외로 간주되어 거리감이 생기기 십상이다. 괴테의 당대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나이 24-5세에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과 소설 『젊은 베르터의 고뇌』로 일약 독일을 넘어 유럽의 스타 작가가 되어 숭배자를 거느리게 되었지만 한편 바이마르 공국의 고위직으로 평생 살면서 자신의 삶을 고공 실험할 수 있었던 괴테에 대해 동시대 급진적인 젊은 작가들은 마치 셰익스피어를 절대왕정에 봉사한 궁정작가라 비난했던 것을 연상시키듯 그를 ‘군주의 시종’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비판)의 바탕에는 한마디로 괴테의 문학이 절박한 현실 문제를 외면한 고답적인 예술주의의 소산이라는 견해가 짙게 깔린 것으로, 그러한 생각(오해)은 따지고 보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괴테의 삶과 문학 속으로 발걸음을 조금 더 옮기면 실상은 선입견과 꽤 동떨어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중세 말 기사 『괴츠』 이야기도, 자살로 끝맺음된 『베르터』의 고뇌도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나 실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대의 태동기에 “우리의 의지가 요구하는 자유(사랑까지도 포함한)가 전체의 필연적인 운행과 충돌하는” 지점을 그려내려 한 것임을 눈치 채기 시작한다. 문학(예술)의 의지 하나로 돌연 감행한 이탈리아 여행도, 당대의 철학자들과의 만남과 갈등도, 혁명의 파고를 의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거리를 두면서 파고들었던 건축과 도로와 광물학, 광학과 색채학과 식물학까지도 근대 세계의 출현과 그것이 가져오는 변화를 이해하려는 사유의 극한적 추구였음을 알게 된다. 그의 문학은 현실을 외면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총체를 투여한 현실과의 대결이었다. 그가 작가적 삶의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파우스트 기획’은 바로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작품 『파우스트』라는 작품 안에 ‘한 편의 비극’이라는 장르 표시를 남겨 두려 했을까? 왜 굳이 그것이 비극이어야 했을까?
전 인류에게 주어진 것을
나는 나의 내부의 자아로서 맛보겠네.
독문학계에서 고전으로 인정받는 『반영의 순간: 괴테의 초기 서정시와 낭만주의의 시작』(1996)과 『레싱의 라오콘―이성의 시대의 기호학과 미학』(1984) 외에도 근대 독일 문학 연구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데이비드 E. 웰버리는 독일 지멘스 학술재단에서 행한 강연 텍스트 『괴테의 파우스트 1 / 비극적 형식에 대한 성찰』에서 비극이라는 ‘형식(장르)’에 집중하여 『파우스트』의 시대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해석해 낸다. 그는 이 비평 에세이의 서두에서부터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파우스트』는 분명 비극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으며, 그럼으로써 비극이라는 장르의 역사에, 다시 말해 인간적인 현존에 대한 감동적이면서도 심원한 형상화를 통해 그리스 시대 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문학예술로 다루어져 왔던 장르의 역사에 등장한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비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성찰을 작품의 내부에서 구성해 내고, 또한 그럼으로써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전개하는 새로운 비극적 사유의 형식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파우스트』가 비극 장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테제를 설명하기 위해 웰버리가 처음 제시하는 것은 ‘전범과 계승’(CHAPTER 1)이라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은 책에서 ‘성찰’로 번역된(옮긴이 해설 참조)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말한 ‘반성(Reflexion)’이란 이성의 수행적 능력이다. 칸트가 말하는 반성적 판단력은 오성의 대상인 객관에 관계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대상이 이성의 목적 및 이성 자체에 적합한지 여부에 관계하는 능력이다. 객관의 대상으로만 향하는 지각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에 의해 추동되는 과정으로 중층적이면서 양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장르(형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칸트적 의미의 계승이란, 장르에 성찰인 동시에 장르 자체의 개념을 작품의 내재적인 목적과 종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본보기가 되는 작품이 그것을 계승하는 작품에 실마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칙들을 자기 안에서 탐색하고, [스스로의] 고유한 길로, 혹은 많은 경우 보다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과정”인 것이다. 괴테는 도입부에서부터 전범이 되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참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적절히 변용함으로써 비극 장르의 에너지를 작품에 부여하며 그것을 『파우스트』의 근대 세계로 불러낸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에는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처럼) 비극적 금기 위반의 특징이 부여되어 있지만 아울러 18세기에 널리 확산된 심리적 발전 개념과 과학이 반영되어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여기에는 기독교적인 의미 역시 개입되는데, 파우스트가 바치는 기도에는 기독교적 순종의 자취가 없으며 오히려 신의 권능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그의 노력은 오만에 다름 아니다. 이는 자기 고양의 충동에 의해 촉발된 종교의 도구화이며 이를 거쳐 마법과 관계 맺는 일의 비극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하여 괴테는 1) 비극의 핵심 모티브인 자기 고양/오만을 중심인물이 느끼는 (기독교적인 맥락을 경유함으로써만 생각될 수 있는) 종교에 대한 절망과 마법에 대한 경도를 통해 새롭게 규정하고, 2) 마법의 도구화에 대한 일반적인 상상을 그레트헨-사건이라는 탁월한 성적 욕망의 시나리오로 구체화했으며, 3) 신화적인 인과(살인-더럽혀짐-전염병)를 자기 고발(페스트-독-살인)과 그 실현(그레트헨의 어머니-발렌틴)의 관계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웰버리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개별적인 내용들을 다듬어냄으로써 도출된 결과가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 진행의 근본을 이루는 구조적 요소들을 대상으로 시도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비극 형식에 대한 괴테의 연구가 체계적인 장르의 개념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실현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은 비극의 동기부여가 이루어지는 과정만이 아니라 인물이 행하는 행위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인류 일체의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구나”라는 파우스트의 절규는 그의 비극적 격정이 계몽주의자들의 연민과 분명히 선을 긋는 차원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탄’은 파우스트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에, 보다 정확하게는 인간적인 존재를 넘어선 무한자가―비극의 중심인물인―파우스트에게로 덮쳐드는 순간에 출현한다. 비극적인 격정이 특수하게 경험되는 이러한 차원을 괴테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인간적인 경험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젊은 베르터의 고뇌』 이래로 “인간성의 한계”를 둘러싼 실존적인 질문이 괴테에게 있어 예술을 통해 극복해야 할 주된 문제의식이었음을 떠올려 볼 때 『파우스트』는 분명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비극적 탐색이라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마침내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인간의 삶이란 “비탄의 나날”에 붙들려 있으며, 지상에는 옳은 것이라고는 없다. 레싱의 말처럼, 이러한 비탄은 “섭리에 반하는 불평”에 가까우며 절망을 불러온다. 이렇게 하여 비극적 격정(비탄)과 장르 개념은 『파우스트』의 전체 틀을 구성하는 질문―창조의 의미와 정당성에 대한 물음―과 결합된다.
지옥이여, 그대는 이런 희생을 필요로 했단 말이냐!
악마여, 제발 이 공포에 찬 시간을 짧게 해 다오!
만약 극적 사건이 쉴 새 없이 우리에게 몰려들고 그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에만 급급하다면, 우리는 극적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웰버리는 『파우스트』의 진행 방식을 휴지(休止)라는 개념을 통해 해석(CHAPTER 2)하는데, 이는 비극의 자기 형상화 그 자체가 인식되는 과정 즉 비극의 미학적 차원의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극적 흐름의 중단을 의미하는 휴지를 통해 관객은 비극의 표상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되며 그를 통해 전체 안에 깃들어 있는 내적인 법칙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표현과 표현된 것 사이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미학적 의식―이 여기에서 싹트는 것이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적 작용을 위해 요구했던 요소인 카타르시스를 비극의 진행 구조에 속한 분명한 요소로 만드는 것이다.
웰버리는 『파우스트 1』에서의 ‘그레트헨 비극’이 대칭적인 구조로 짜여 있음을 제시하는데, 장면들이 거울상을 이루게끔 배치하는 이러한 기법은 비극적인 실체에 보다 깊이 관여하며, 의미의 전환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대칭 구조의 한가운데에 배치된 휴지를 통해 부각되는, 균형을 이루는 부분들은 시간에 따라 정돈된 사건의 순서들이 켜켜이 쌓이는 전형적인 배열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의미의 전도가 만들어 내는 비극의 논리적 순환이 가시화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우스트는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던 메피스토펠레스로부터 잠시 떨어지는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 거리를 두는 관계를 획득하는 것이다. 관객의 시선 또한 더는 사건들을 따라가지 않게 되며 각자에게 주어지는 미학적 의식의 거리를 통해 몰락의 불가피성을 감지하게 된다.
대칭의 한복판에 있는 「숲과 굴」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 배치된 파우스트의 긴 독백이 갖는 극적인 위상이 바로 그러하다. 여기에서 파우스트는 자신과 그레트헨의 운명이 될 광경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것은 자연과 예술의 법칙이 아니라, 파멸을 희구하는 동시에 그것이 강제되고 있는 비극적인 열망의 합법칙성이다. 또한 형상의 아름다움과 그 내용이 만들어 내는 긴장, 또는 미학적인 의식과 비극적인 사건 간의 긴장이 무엇보다도 강렬해지게 되는데, 이 긴장이야말로 비극적 형식의 근본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 장면을 끝으로 관객의 의식과 중심인물의 의식은 다시금 멀어지게 된다. 저 독백은 파우스트가 비극적 사건의 계속되는 필연성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미학적 성찰을 그만두는 순간에 끝이 나게 된다. 그의 성격에 깃든 악마성―“도처에 만연한 파괴적인 활동력”―이 다시금 활력을 얻고, 바라봄의 작용은 “확장된 실제적 현존재를 향한 갈망”에 또다시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그가 필연의 멍에를 걸머질 때, / 가슴 속에는 죄 많은 숨결이 맺히네.”) 인간의 결정과 필연의 요구가 분리될 수 없게끔 뒤얽혀 있는, 전형적인 비극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교차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다름 아닌 파우스트 자신이다. 다름 아닌 비극의 중심인물이 자기 자신의 행위에 깃든 비극성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파우스트 1』의 결말부에서 파우스트는 스스로에게 닥쳐온 소름 끼치는 죽음을 증언하는 그레트헨의 말을 통해, 그녀가 겪고 있는 가혹한 고통이 자기에 의해 초래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는(anagnorisis)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인공의 속죄는 그가 저지른 어떤 죄가 아니라 물려받은 죄를 대상으로 하는, 다시 말해 ‘존재 자체의 죄’를 대상으로 사유(쇼펜하우어)이며 비극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존재한다. 나아가 비극이란 존재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생의 가치를 의문에 부치는 의식적 과정(니체)인데, 이는 극단화된 부정성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사건 진행으로부터 삶에 대한 생산적인 긍정을 산출하는 결과를 동반하는 역설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현존재의 거부를 통해 현존재의 가치를 보증하는 미학적인 형성 과정으로서 이러한 부정성, 정당화, 그리고 미학적 과정이 다름 아닌 괴테의 비극을 구성하는 의미 공간의 좌표들인 것이다.(CHAPTER 3)
“인간은 노력하는 한 오류를 범하는 법이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이 말은 신에 의한 의 종속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근대적 인간 주체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근원적 비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노력’은 단순한 능동성 혹은 ‘멈추기를-원하지-않음’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창조를 향한 열망이며, 창조 행위에 대한 참여의 근본 형식으로서 제시되는, 가장 드높은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라는 발상은 괴테에게서 빈번하게 목격될 뿐만 아니라 그의 근본적인 신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렇듯 노력은 저절로 생겨나는 힘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향한 의도적인 지향인 까닭에 위협에 직면한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절망에 사로잡혀 창조에 등을 돌리는 행위, 즉 노력의 중단은 곧 인간 존재가 갖는 탁월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파우스트는 감각적 향유의 충족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며, 힘겨운 노력과 끝없는 탐구, 근면함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데에 매혹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은 섭리에 속해 있는 행위이며, 그 내적인 원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신 또는 창조와 맺는 이러한 연관은 위험 앞에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이 위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오류를 범하는 법이다.” 하느님의 답변이다. 오류의 위협은 노력이 추구하는 목표 안에, 근원을 향하려는 인간의 계획 속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신의 아들이 맞이하게 될 파국에 대한 괴테의 이해는, 그가 구상했던 근원으로 향하려는 노력이 이미 의미심장한 오류의 가능성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었음을 내비치고 있다. 근원을 향한 노력이란 그것이 즉각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비롯된 성급하고 과도한 행보로 말미암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가슴 속에 처음부터 비극적 이행의 가능성이 심어져 있었던 까닭에, 섭리에 닿고자 하는 노력은 메피스토펠레스의 공격이 시작되는 최적의 목표가 된다. 파우스트적 노력이 초래할 사랑스러운 소녀의 참혹한 불행이라는 결말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라도, 정당성의 법정은 이 극단적인 위협을 불가피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고, 다름 아닌 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상황이 곧 비극을 완성해 내는 것이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발전시킨 장르의 컨셉 안에서, 비극은 이제 세계를 긍정하기 위한 한 줄기 빛을 구하기 위해 급진적인 부정성 안으로 뛰어든 문학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자아는 무한으로 향하는 그의 유한성이자, 유한으로 향하게 되는 그의 무한성이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구현한 비극의 형식은 파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단순한 실수로, 다시 말해 주의를 기울이면 피해 갈 수 있는 어떤 실책으로 설정하지 않는다(그렇게 될 때 방종을 경계하는 도덕적 교훈으로 기울며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이해는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오히려 비극의 주인공을 ‘한계-존재’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럴 때 비극 장르로서의 『파우스트』가 한계와 초월의 동역학이 전개되는 무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보유: 비극적 주체성의 개념에 대하여’)
노력은 인간 활동의 특정한 방식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구조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존재란 무한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져 넣는 존재이다. 누구든 노력하며 애쓰지 않는다면, 그는 곧 인간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요구들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유한한 주체는 오직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현실로도 그것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피히테) 그 결과 유한한 것들 안에서 무한한 것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 내는 특수한 경험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는 요구가 여기서 싹튼다. 『파우스트』에서 비극적인 월권행위는 자기 신격화의 판타지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것은 자기-산출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은망덕은 인간이 “가장 완전한 동시에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행복한 동시에 가장 불행한 피조물”이 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적인 본성의 이중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불행한 노력을, 다시 말해 신성한 것과 육체적인 것을 인간 안에서 합일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상반된 것 안에서의 투쟁의 상태)에 ‘비극적 주체성’이 자리하는 것이다. 비극은 바로 이와 같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의 재료로 삼는 형식인 것이다.
그녀는 구원받았도다!
무한을 향해 감행되는 이 초월은 서로 결합되어있는 요소들(유한성/무한성)을 강제적으로 분리함으로써 파국을―비극적인 것으로서, 혹은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서―불러오고, 매 순간 초월을 위한 시도가 감행될 때마다, 거부된 유한성의 실체들은 무한성의 추상이 자아내는 부정적인 타자들로 되돌아오고, 실망의 고통이라는 보복을 가하게 된다. 그것을 거부하려 드는 순간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유한성의 변증법은 고양과 전락이라는 진폭을 형성함으로써 비극적 성격의 원리를 구성하게 된다.
파우스트는 눈앞의 현실 안에서 시간과 영원을 종합하는 데에 실패한 자이다. 이 실패는 파우스트의 존재에 나 있는 균열이며, 그는 이것을 결코 메울 수 없다. 유한한 시간은 파우스트의 세계 위에 먼지처럼 쌓여 있고, 연기처럼 흩어져 있다. 신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영원의 동굴에 인간이 발을 들이려 한다면, 그것은 곧 금기를 위반하는 일이자, 오만이며, 루시퍼적인 배은망덕이 된다. 파우스트의 비극은 바로 이 시간-테마와 신화적-신성모독적 경계 침범의 교차에 근거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자살 충동조차도 그것은 절망의 행위가 아니며, 오히려 “순수한 행위의 새로운 영역”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이다. 즉 파우스트의 자살 시도는 곧 자기 자신의 원천인 순수한 자기 생산적 활동을 경험해 보고자 하는 신적인 시도(“인간의 권리가 신의 높이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오만함이 자리한)가 되는 것이다.
그레트헨과의 성적인 결합이라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우스트의 성적 판타지는 신의 지위를 강탈하여 완전한 창조의 상을 장악함으로써 그 자신을 원천으로 전치하려는 루시퍼적인 배은망덕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파우스트』가 비극으로서 뿌리내리고 있는 영역은 시민 사회의 성도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성성의 영역인 것이다. 파우스트의 한밤중의 비밀스런 방문은, 저 신성모독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들을 구성하게 된다. 그레트헨과 파우스트를 둘러싼 비극적 사건의 차원은 창조 신학과 성애 문제의 뒤얽힘으로 나타나며, 자기 존재의 원천이자 신적인 것에 대한 체험으로서 절대적인 성행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섭리적인 노력이 범하는 이러한 오류는 배은망덕과 신성모독으로 나아감으로써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레트헨은 유한자로서 무한에 관여하고자 하는 파우스트의 신성모독적인 시도가 만들어 낸 희생양인 것이다.
파우스트가 감행하는 자기 고양의 시도를 신의 섭리로 되돌리고자 하는 그레트헨의 시도는 실패한다. 사랑의 불길을 일으켰던 이의 침묵과 차가움은, 그토록 주저 없이 뛰어들었던 신성모독적인 사랑의 망상으로부터 그녀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부는 파우스트를 향한 사랑을 부정하는 선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저 사랑이 갖는 신성모독적인 성격에 대한 거부를 겨냥하고 있다. 파우스트를 부르는 그레트헨의 마지막―1부의 마지막이기도 한―말은, 그를 그리는 소녀의 외침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형식으로 그를 인도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것은 창조의 원리로서의 사랑이 신성모독적인 날조에 맞서 스스로를 입증해 내고자 하는 의식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트헨의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자신이 앞서 주장했던 창조의 가련한 실패에 대한, 그리고 노력의 무용함에 대한 증거로 내세운다. 파우스트에게 “이리로 오시오!”라고 말할 때, 이는 파우스트가 최종적으로 스스로의 근원을 배반하고 자신의 길로 인도되었다는, 일종의 승리 선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천상의 음성이 울려오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저 선고를 바로잡는다. “그녀는 심판받았도다!”가 아니라, “(그녀는) 구원받았도다!”라고. 『파우스트』의 결말에 나오는 이 장면에 대해, 웰버리는 저 음성을 초재적인 존재에 의한 극적인 사건에 대한 개입으로 이해하는 일반적 해석을 경계한다. 그는 여기서의 신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저 천상의 음성을 어디까지나 칸트적인 음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의 저 개입은 그레트헨이 견뎌내야만 했던, 그러나 또한 그것을 견뎌냄으로써 그녀의 사랑에 순수성을 부여하게 될 운명의 의미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극 장르에 대한 괴테의 성찰 안에서, 비극은 이렇듯 극단화된 존재 부정의 경계에까지 이르며, 창조의 원리로서 사랑이 갖는 힘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법정을 형상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극의 결말을 가로지르는 서로 다른 음성들 간의 불일치를 통해, 미학적인 신정론으로서의 비극은 완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