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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ㅡ'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    

사이토 타마키​(지은이) 이정민, 최다연(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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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싸우는 소녀’들을 알고 있는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세일러 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

 

근육질의 아마조네스계 여전사와는 다른,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 않은 가련하고 무구한 ‘전투미소녀’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등장해 온, 에로티시즘의 기호로 다가오는 이 특수한 존재들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어 온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특수한 문화 현상인가, 아니면 ‘정보화 환상’이 지배하는 공허한 세계에서 우리의 욕망―히스테리 증상이 마주치게 될 거울상 같은 존재들인가.

 

‘오타쿠’ 공동체의 심리적 특성을 섹슈얼리티의 시각에서 철저히 분석함으로써 서브컬처 문화 연구의 고전이 된 사이토 타마키의 책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이미 우리의 곁에 다가온 낯선, 아니 낯설지 않은 존재들을 대면할 근거를 얻게 된다.

1. 당신은 ‘싸우는 소녀’들을 알고 있는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세일러 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에는 지난 수십 년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투하는 미소녀’들의 계보라고 할 법한 고유한 표현 장르가 존재해 왔다. 그것도 마이너한 영역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미디어의 영역에까지 그러하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등장하는 근육질의 아마조네스계 여전사와는 전혀 다른,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 않은 가련하고 무구한 전투미소녀. 커다란 눈과 작은 입술, 에로티시즘의 기호로 다가오는 신체를 지닌 이 특수한 존재는 어떻게 해서 일본 문화에서만 보이는 현상일까? 일본의 정신분석가이자 임상의인 사이토 타마키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아니메(일본 애니메이션)의 앳된 히로인은 직접 중화기를 손에 들고 사춘기를 전투 행위에 바치는 것일까? 왜 그녀들은 성숙한 여성이 되어 남성 못지않은 활약을 할 때를 기다리지 않는 것일까? 더구나 이 ‘싸우는 소녀’들은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잔 다르크와 달리 허구적인 콜라주임에도 어째서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서 대량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허구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투하는 미소녀라는 이콘(Ikon)은 욕망의 대상이 되고 그것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리얼리티를 얻게 되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 사이토는 이 질문 앞에서 자의적이고 상투적인 해석을 우선 경계한다. 일본인의 ‘로리타 지향’이니 일본인 취향의 다형도착적인 심벌(symbol)이니 하는 해석들, 그리하여 “일본인이여, 아니메를 버리고 성숙하라”라는 식의, 하나의 민족성과 일정한 도착 경향을 단순한 인상에 의거하여 훈계에 이르는 목소리들이 윤리 이전에 비과학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사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소녀’라는 이콘은 일본의 오리지널도 독자적인 분야도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의 ‘아웃사이더 아티스트’ 헨리 다거(Henry Darger; 1892-1973)를 언급한다. 그가 남긴 방대한 글과 그림에는 사악한 어른의 지배로부터 노예 아동을 해방하기 위해 총을 들고 싸우는 일곱 명의 비비안 걸즈(Vivian Girls)가 등장한다. 그런데 소녀들의 순진무구한 에로스와 피투성이의 잔혹함이 대비되는 강렬한 그림 속의 그 소녀들은 기묘하게도 소년과 같은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

 

이 다섯 살부터 일곱 살의 금발 미소녀들, 페니스를 지닌 ‘팰릭 걸즈(Phallic Girls)’ 역시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도착증의 산물로 보고 피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욕망의 거울로서 망설이면서도 응시해 나갈 것인가. 저자는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만든 헨리 다거의 왕국에서 하나의 자율적인 욕망의 리얼리티 공간을 발견한다. 그곳은 사춘기적 심성과 미디어 환경의 생산적인 커플링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전투미소녀(들)와 팰릭 걸(들)이라는 표상물은 성적 욕망의 대상―원인과 결과로서―이었던 것이다. 이 ‘싸우는 소녀’들과 그녀들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이른바 ‘오타쿠’ 공동체의 심리적 특성을 섹슈얼리티의 시각에서 철저히 분석한 책이 바로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이다.

 

 

2. 오타쿠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어떻게 ‘싸우는 소녀’들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오타쿠란 아니메나 괴수 등 유치한 대상을 꼭 쥐고 놓지 못한 채로 성장해버린 미성숙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인가? 성숙한 인간관계, 특히 실제의 성관계를 무서워하며 허구에 대해서만 욕정을 품는 자폐적 정신병자인가? 저자는 오타쿠 자체를 병적으로 취급하는 접근방식을 거절한다. ‘오타쿠의 정신병리’라는 표현은 오타쿠인 것이 그 자체로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타쿠란 근대적인 미디어 환경이 일본(인)의 사춘기적 심성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성립된, 기묘하고 독특한 공동체이다. 게다가 이렇게 일본 문화 속에서 생겨난 독특한 공동체는 일본이라는 공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를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미디어 환경의 변화(발달)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일반화할 수 있는 모종의 작용관계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오타쿠는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저자는 오타쿠에 대한 가치판단을 의식적으로 보류한 채 정신분석가로서 오타쿠 이해에 대한 독창적인 준거를 제시한다. 오타쿠란 우선 허구적 콘텐츠에 친화력이 높은 사람이며,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허구화라는 수단이 작용하는 사람, 즉 허구 그 자체에서 성적 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에 실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마니아하고도 다르다. ‘실체=오리지널’의 아우라에 매료되는 것이 마니아라면 오타쿠는 ‘허구=복제물’의 아우라를 스스로가 허구화해 보이는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그것을 더욱 자신 만의 허구로 레벨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단지 현실에서 도피하여 허구 세계에 틀어박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지 않고, 허구와 현실의 대립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다중 지남력(자신을 이해하는 기능)이 발휘될 수 있는 허구(적 대상물)에 몰입할 뿐이다. 그가 코어(core) 오타쿠로 불린다면 심지어 허구적 콘텍스트의 레벨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오타쿠의 보다 분명한 특징은 허구적 대상물 속에서도 현실과 동등하게 리얼리티를 발견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어떠한 계기로 오타쿠가 되는 것일까? 불가능한 대상, 만질 수도 없는 여성의 대체 어디에 끌리게 되는 것일까? 섹슈얼리티 자체가 지닌 허구성, 다층성을 감지하는 것. 아니메에 그려진 소녀(여성)에게 처음 욕망을 느낄 때 그는 당황해 하면서도 이 사실에 감염되어 버린다. 이것이 그에게 외상(外傷)으로 남겨지면서 ‘성(性)’은 허구의 프레임 속에 해체되고 다시 통합된다. 여기가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이제 허구의 리얼리티라는 역설적 감성이 그(들)의 기본적 욕구의 방향을 결정한다.

 

오타쿠란 근대적 미디어 환경이 사춘기의 심성과 상호작용하면서 출현한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한 말을 상기하자. 오타쿠에게서 결정적인 것은 상상적인 도착 경향과 ‘건강한’ 섹슈얼리티의 괴리이다. 아니메에 그려진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자위와 도착증을 되풀이하면서도 헤테로섹슈얼의 일상도 유지한다. 이러한 분열 위에서 그는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원히 풀 수 없는 물음으로 인해 더욱 히스테리화해 간다. 그는 허구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반전-결합-왜곡 등을 가하고 다루지 않으면 못 배긴다. 전투미소녀의 이미지에는 모든 성도착이 담겨 있다. 그것은 동성애(소녀의 팔루스), 유아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시즘 의 흔적이 있는 다형도착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투미소녀라는 이콘은 오타쿠적 브리콜라주의 멋진 발명품인 것이다.

 

 

3. 그렇다면 다시, 전투미소녀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하여 생성되는가?

 

‘싸우는 소녀’들을 줄곧 키워온 것은 물론 오타쿠 공동체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오타쿠라는 특수한 공동체의 수요로 성립되고 발전해온 특수한 미디어 공간―만화, 아니메―이 그녀들이 키워진 장소이다. 아니메라는 미디어 공간은 우선 만화로부터 계승한 ‘무시간성’을 특성으로 갖는다. 데즈카 오사무 이래 일본 만화 속의 시간은 균질적이지 않고 독자의 주관적 몰입을 강하게 이끌어내고 매우 빠른 독해가 가능하게 만드는 ‘고밀도’와 ‘고속’의 양립이라는 표현 기법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하이컬처를 지향하는 문예적인 것들이 좁은 영역으로 밀려나는 현실에서 단순성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무한히 갱신할 수 있는 서브컬처는 그것이 표층적임으로 우리를 계속 매료(몰입)시킨다. 그것은 복잡한 인격은 그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매력적인 전형’을 산출해 내는데 전투미소녀 또한 이러한 전형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송신자와 수신자의 거리감이 없거나 매우 짧은 아니메나 만화의 하이콘텍스트성이 지니는 고밀도의 전달성은 극단적인 집중과 몰두를 용이하게 한다.

 

저자는 여기서 전투미소녀에 대한 욕망이 현대적인 미디어 환경에 의해 내파(Implosion)되고 확장된 우리의 내적 변질의 징후인가라고 묻는다. 프로이트에 의해 발견된 뒤로부터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신경증적 주체의 구조와 욕망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욕망의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욕망의 대상이 계속해서 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욕망의 대상의 표층적인 변화는 분명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계의 형식적 변화로, 우리의 상상계는 현저하게 증폭되고 가속되었지만 수단의 다양화는 또한 내용과 형식의 빈곤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다양한 공간에서 말해지는 이야기들은 놀랄 만큼 서로 닮았으며, 전투미소녀의 커다란 눈동자와 조그마한 입은 그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아니메의 공간은 우리의 상상계에 간단하게 공유 가능한 코드 계열을 도입했다. 이러한 공유 가능성이야말로 이 공간 내에 다형도착적인 요소를 도입하게 한다. 이 허구적인 공간에 자율적인 욕망의 대상을 성립시키는 것, 현실의 성적 대상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담보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 허구가 자율적인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허구 그 자체가 욕망될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이 오타쿠의 궁극적인 꿈이자 목적이 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일본적 (서브컬처) 공간에서는 허구 그 자체의 자율적인 리얼리티가 인정된다. ‘그려진 것’에 대한 금기와 억압이 작동하는 서구와 달리, 그래서 그려진 것은 항상 현실적 대상을 대체하는 가상의 지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다양한 허구에 자율적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이 허용된다. 리얼한 허구는 현실이라는 담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허구가 현실을 모방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고 서브컬처에서 리얼리티를 떠받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섹슈얼리티로 소녀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리얼리티를 가져오기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섹슈얼리티는 ‘교통 과잉성’과 ‘이해 과잉성’으로 인해 리얼리티 효과가 줄어들 수 있는 하이콘텍스트적 공간에서 여기에 대한 저항으로도 기능한다. 이 하이텍스트적 공간에서는 헤테로섹슈얼적인 욕망의 콘텍스트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라는 움직임이 중요하므로 성적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일반화된다. 양성구유, 변신(=빠른 성숙), 능동성(=전투능력)과 수동성(=아름다움)의 기묘한 혼합이라는 전투미소녀의 여러 특징은 이러한 넘어서기의 리얼리티의 발생을 용이하게 한다.

 

전투미소녀라는 이콘은 이러한 다형도착적인 섹슈얼리티를 안정적으로 잠재시킬 수 있는 특이한 발명품이다. 그녀들, 팰릭 걸들은 트라우마를 지닌 팰릭 마더(Phallic Mother)와 달리 ‘강간당하지 않는 존재’,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실제 체험도 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녀들은 한마디로 철저하게 공허한 존재이며, 이러한 공허함을 통해 욕망과 에너지를 매개하며 허구 세계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다. 아니 이 존재의 근거 없음이야말로 만화, 아니메라는 철저히 허구적인 공간에서는 역설적인 리얼리티를 발생시킨다는 역설.

 

일상적 현실과 해리(解離)된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의 자장은 필수적이다. 우리의 다양한 욕망 중 성욕은 허구화에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다. 성욕은 허구화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따라서 간단하게 허구적 공간에 이식될 수 있다. 전투미소녀-팰릭 걸은 허구적 공간에 리얼리티를 가져오는 결절점으로 작동한다. 여성을 욕망한다는 것은 여성을 히스테리화하는 것이라 할 때, 팰릭 걸의 순진무구함과 그것을 배신하는 유혹적인 표층과의 갭은 히스테리의 최대의 특징이 된다. 팰릭 걸은 왜 싸우는가? 그녀는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싸움으로써 존재’한다. 히스테리증자의 존재 증명이 그 ‘증상’으로 이루어진다면 팰릭 걸의 존재는 전투라는 증상 속에서 성립한다.

 

헨리 다거를 매료시킨 것은 그 자신이 열어젖힌 환상적 공간 속에서 그야말로 반전된 히스테리 소녀였다. 외상 대신 페니스를 가진 소녀를 그리는 것, 성숙에 저항하면서 끝없는 전쟁 이야기를 계속하여 지어내는 것이 그에게 새로운 생성의 동력을 가져다주는 행위였다. ‘정보화된 일상’이라는 환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현실 이상으로 리얼한 허구’의 존재 같은 것은 이미 전혀 놀랍지 않다. 그 공간에서 욕망에 접촉하고 전투하는 소녀들을 기동시키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끝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결코 존재할 리 없는 이들 ‘싸우는 소녀’들에게 끌리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세계의 정보화, 즉 세계 전체의 평평한 허구화에 저항하기 위한 전략은 아닐까? 정보화 환상에 의한 허구화, 상대화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 그것이 성(섹슈얼리티)이다. 우리가 일본의 아니메와 만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미디어 공간에 노출된 사람들이 ‘정보화 환상’에 틀어박히려고 할 때 그곳에 리얼리티의 회로를 열기 위해 현현하는 ‘싸우는 소녀’들의 모습이다. 아니메라는 미디어 공간은 섹슈얼리티라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한 대피장소가 된다. 우리는 이 장소에서 욕망의 경제를 충분히 경험하고 그 후에 일상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불합리하게도 성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지만, 사람들은 종종 이를 잊으려고 한다. ‘정보화 환상’은 미디어가 발달됨으로써 우리의 심리가 상상계의 원리만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저자는 그러한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타쿠적 삶의 형식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에게 ‘현실로 돌아와라’ 같은 설득은 무의미하다.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팰릭 걸을 사랑하는 것 역시 하나의 적응을 위한 전략이라면, 문제는 과도하게 정보화된 환상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이보다 더 나은 ‘삶의 전략’을 전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4. 그밖에도 이 책에는 중요한 성취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레퍼런스들이 있다.

 

이 책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안에는 일본의 서브컬처를 이루어온 만화와 아니메 속 ‘싸우는 소녀’들의 계보가 그려져 있고 개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외 지역에 등장하고 또 출현하고 있는 전투하는 여성도 분석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1990년대 이후 서구에서도 전투미소녀 풍 작품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디어 환경의 발달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로서 일반화할 수 있는 어떠한 작용관계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현상이 필연적인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언제부턴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온, 우리 안에서 생성되고 있는 ‘싸우는 소녀’들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신의 전략을 고민하려는 사람에게 사이토 타마키의 책이 중요한 준거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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