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소크라테스, 철학적 욕망의 기원에 관하여 

​백상현(지은이)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 온 소크라테스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가 서구철학의 기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주거나, 행복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거나,

인생의 숨겨진 의미 따위를 찾게 해주는 멘토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찌할 건가.

대체 우리가 철학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왜 철학하기를 욕망하는가. 아니,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을 어지러운 욕망을 제압하는 고상하고 높은 이성에 대한 추구로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여기 소개하는 책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소크라테스, 철학적 욕망의 기원에 관하여』를 펼쳐 읽기 시작하면 철학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우리가 애써 억누르려 했던 내면의 어떤 욕망이 다시금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책은 첫 장부터 대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진지한 철학자로서의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기대한다면 다른 책을 선택하라고 권고한다. 이 책에는 인생의 숨겨진 의미를 찾도록 해주는 멘토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어디에도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자기검열을 강요하고, “악법도 법”이니까 세상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꼰대들의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등장하는 것은 악령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세상이 진리라고 가르친 것들을 모조리 해체하거나 전복하려는 욕망의 화신이자 ‘정신질환자’ 소크라테스다. 따지고 보면 사실이 그랬던 것 아닌가. 아테네 법정은 ‘모두의 복리를 위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것 아닌가. 소크라테스에 관한 증언들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그는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말싸움을 일삼던 히스테리증자이자, 신으로부터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았다고 떠벌리고 다녔던 과대망상증 환자로 여길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이 책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던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이고,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도 신을 모독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선동가의 이야기이며, 결국은 스스로 진리의 정신병에 사로잡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플라톤이라는 강박적인 추종자에게 자신의 광기를 전염시켰던 병원균의 이야기이다.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신을 모독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선동가, 그럼에도 일단의 제자들을 매혹시킬 줄 말았던 아갈마의 화신이던 한 노인, 이 책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이 병적인 욕망 자체에 대한 해명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를 통해 철학이 세계-권력에 대항하는 소수자의 또 다른 정신병적 욕망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라캉주의자인 저자는, 철학이란 철학자가 만들어낸 지식이나, 그것을 기록한 텍스트가 아니라 어떤 특수한 유형의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이 욕망은 그렇다면 무엇을 향하여 우리를 몰아세우는가. 저자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권력의 강박증이 법/제도와 우리의 일상까지도, 나아가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지배하는 정신병적 세계이다. 지배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 누구도 정상일 수 없는, 다만 권력을 가진 쪽이 정상이라는 규준을 가졌다는 환상을 획득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다수의 권력이 소수를 병적이라 치부하며 자신의 정상성을, 다수의 환상에 불과한 그것을 폭력적으로 강제할 뿐인 것이다. 철학이 하나의 욕망이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세계(와 그것이 강요하는 삶)를 변화시키려는 욕망이며, 현재의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권력에 대항하는 고함소리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흔들림과 우울과 충동을 가져오고, 또한 불가피하게 권력의 개입을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얼마나 병적으로 매혹적인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사로잡혔던 히스테리와 편집증이 세계의 강박증에 반기를 드는 대단히 매혹적인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말이다.

 

철학은 어떤 특수한 유형이며, 이것을 전수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던 역사적 사건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다. 그는 상식과 고정관념의 이름으로, 다수의 행복이라는 환영을 위해 살해당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런 다음 아테네는 행복을 획득했는가? 저자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사태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금 아테네를 찾아와 유령처럼 떠돌기를 멈추지 않았고 잠든 플라톤을 깨웠다. 그런 다음에는 플라톤의 목소리를 통해 아테네를 들쑤셨다. 니체의 소크라테스, 푸코의 소크라테스, 라캉의 소크라테스 역시 동일한 것 아니었던가. 철학이란 바로 그러한 욕망의 출현과 전수의 과정이고, 그러한 욕망이 가진 병적인 구조가 아닌가 말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어떠한가. 책의 에필로그(「소크라테스는 어디에나 있다」)에 나오는 저자의 다음의 말이 그에 대한 답이 될 터이다.

 

“이 책의 1장 후반부 소크라테스의 히스테리적 욕망에 관하여 쓰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일종의 계시와 같다고나 할까. 내가 그토록 집중하여 탐사하고자 했던 철학적 욕망의 기원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광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고딩들에게서 그대로 발견되고 있었다.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나의 욕망을 세공하려 한다는, 도발적인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단지 흩뿌려지는 욕망이 아니라, 정밀하게 반복되는 방식으로 꼰대들의 담화가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소크라테스가 그들이었다, 고 나는 확신한다. [……]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어디에나 있다. 그는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유형일 뿐이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이도록 만드는, 타자의 담화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순간 덮쳐오는 타락의 속도감이다. 그것이 만드는 환상의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세계의 환상에 대항하는 소수자의 환상…… 그런 다음에는 투쟁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