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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사랑, 바디우 박영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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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래로 사랑은 이론이나 지식에 구멍을 내는 사이이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모든 말하기는 잘못된 말하기이며,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사랑의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틈을 라캉과 바디우 사이에서 들여다본다. 사랑을 바디우와 라캉 사이에서 바라보는 것은 많은 것들을 함축한다. 그것은 사랑을 실재와 진리, 행위와 사건, 증환과 이념, 환상과 행복, 주이상스와 참된 삶, 기표의 주체와 진리의 주체, 분석가 담론과 해방의 정치, 반철학과 철학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뜻한다. 사랑 사유의 과제가 사랑의 문제적이고 모호한 틈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는 데에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책은 ‘라캉과 바디우 사이’를 통해 사랑의 역설과 곤란을 재사유하고, 사랑에 관한 새로운 잘못된 말하기를 실천하고자 한다.

“사랑에 관한 말하기는 가장 급진적인 잘못 말하기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과연 알고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관한 말은 끊이지 않는다. 사랑에 관해 말하는 책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더 보탤 것도 없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하며 그 나름의 견고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전 작고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레이먼드 카버는 이러한 안이한 추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사랑에 관해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선 창피해 해야 마땅해.” 이게 무슨 말인가. “사랑은 말야……”로 시작하는 모든 이야기는 모두 헛소리이고 심지어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건 좀 심한 것 아닌가.

 

이는 사랑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으니 입 다물고 너희는 사랑이나 해라. 이런 소리가 아니다. 정반대이다. 사랑이란 그럴듯한 이론이나 지식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반(反)이론 반(反)지식의 차원에 속하니 너희가 사랑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의심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하지만, 사랑에 대해 잘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렵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을 둘러싼 상황을 돌아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만도 아니다.

 

동시대 사랑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관념은 ‘안전한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위험 부담도 없이 조건적인 거래에 따른 사랑을 종용하는 미디어와 눈 뒤집어지면서 사랑을 해 봤자 현실 앞에서 다 부질없다는 늙은이들(이것은 결코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다)의 훈계를 들으며 살고 있다. 미디어와 늙은이들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며 사랑에 대해 옳은 말과 틀린 말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도 연애 포기 세대의 절망, 연애 자본의 양극화, 저출산, 남혐 여혐 갈등과 같은 사회적 증상 앞에서는 잠잠해지고, 사랑에 내재적인 역설과 난점, 모호성과 곤란함 앞에서는 무력해질 뿐이다. 사랑이 본래적으로 이론에 저항하고 지식에 구멍을 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관한 온갖 잘못된 말하기가 자유롭게 순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만이 사랑에 다가갈 수 있는 진정한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에 관해 잘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껴안으면서 어떤 새로운 말하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책은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과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뒤얽힘을 통해 사랑을 살펴본다. 1장은 사랑-사이, 즉 사랑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이(metaxú)라는 논제를 제기하고, 서구 사상에 함축된 사랑-사이의 계보를 구축하고, ‘라캉과 바디우 사이’를 통해 그 계보에 개입한다.

2장은 수학을 통해 사랑을 다룬다. 수학은 라캉과 바디우가 사랑에 관한 사유를 혁신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이를 고려하여 저자는 어떻게 사랑이 성별화 공식, 수, 양상 논리, 위상학, 매듭 이론을 통해 접근되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사랑에 대한 라캉과 바디우의 수학적 접근에서 논의되지 않고 암묵적으로 남아 있는 귀결들을 전개하고 사랑의 공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3장은 정치와 관련하여 사랑을 다룬다. 정치는 라캉과 바디우가 격렬한 대립관계(보수적 계몽과 급진적 해방) 및 상보적 동반관계(현재 상태에 대한 분석과 새로운 세계의 이념)에 놓이는 논쟁적인 영역이다. 이 점을 바탕으로 저자는 동시대 사랑의 위기, 우애의 재발명, 사랑의 공동체, 사랑과 인류의 문제를 다룬다. 나아가 정치와 사랑 간의 모호한 매듭을 강조하면서 사랑의 탈권력(impouvoir/unpowe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4장은 반철학과 철학을 통해 사랑을 다룬다. 저자는 바디우가 제시한 라캉 반철학의 특징들을 분석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토니 타키타니」를 참고하면서 사랑에 관한 반철학과 철학 간의 대화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사랑은 정신분석적 증상과 철학적 진리, 분석 행위와 철학적 작용 사이에 놓인다. 4장은 증환적 진리와 원(元)사랑의 행위라는 개념을 정교화하면서 결론 맺는다.

5장은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의『D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다. 고르의 편지는 라캉과 바디우 사이에 놓인 사랑, 즉 바캉적(Ba-canian) 사랑의 구체적 사례이다. 저자는 고르와 그의 연인 도린이 어떻게 그들의 예외적인 사랑의 여정(만남과 결혼에서 시작해서 증상과 권력에 대한 투쟁을 거쳐 동반 자살에 이르는)을 통해 라캉적인 것과 바디우적인 것을 엮어내는지를 논의한다. 5장은 바캉적 사랑의 이념을 공식화하면서 결론 맺는다.

결론에서 저자는 플라톤의『에피노미스』의 중간자적 정령(daimōn)과 관련해서 사랑-사이의 테마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고통의 참여자로서의 분석가와 진리의 식별자로서의 철학자의 뒤얽힘을 제기한다. 이 뒤얽힘이 유발하는 문제의식을 전개하면서 저자는 사랑하는 이의 길은 라캉적인 비(非)사랑과 바디우적인 초(超)사랑 간의 사잇길임을 주장한다. 사랑의 길이란 사랑과 식별되지 않는 사랑 없음에 마주함으로써 사랑의 수수께끼를 인정하고, 무한히 스스로를 넘어서는 사랑을 충실하게 창조함으로써 사랑의 원칙에 헌신하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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