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양심을 지닌 아킬레스 (주제들 5) 

폴 A. 캔터 ​(지은이)  I  권오숙 (옮긴이)

“기뻐할지어다. 나의 영국이여.

그대는 모든 유럽의 연극 무대가

경의를 표해 마지않을 한 작가를 가졌으니,

그는 한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만세(萬世)의 인물인지고!”

 

―벤 존슨(Ben Jonson)

셰익스피어는 당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왕권을 신비화하고,

지배 세력의 담론을 강화시킨 편견에 사로잡힌 작가인가,

아니면 벤 존슨의 예언 같은 말처럼 “한 시대가 아닌 만세(萬世)를 위한 작가”인가?

그가 400년 전의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가 아니라 현대 세계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대의 극작가요 시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째서인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지닌 보편성은 단지 그의 화려하고 빼어난 어휘와 문장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저 암기의 대상일 뿐인가, 아니면 온전히 해명되지 않은 그의 독특한 역사의식과 인간 이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풀어야 할 인식의 과제로 남겨져 있는가?

 

셰익스피어 해석의 전혀 다른 차원과 깊이!

마지막 비극 『맥베스』에 담긴 패러독스와 셰익스피어의 정치성(현재성)을 해명해 내는 『셰익스피어의 로마 3부작』의 저자 폴 A. 캔터의 역작.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요,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Fair is foul, foul is fair).”

_ 『맥베스』, 1막 1장 11행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 이상의 순정함과 현실의 추함 사이, 순간과 영원 사이, 영웅과 폭군 사이, 흔히 견고하다고 생각되는 대립적 경계의 개념들이 실은 현실에서는 백지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거나 등을 맞대고 있고, 우리 인간의 내부에서 한순간 뒤엉킬 수 있다는 사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집필된 작품 『맥베스』는 그러한 역설을 일깨워주려는 듯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요,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마녀들의 말로 시작한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가 그렇다면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 허물어지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가. 『맥베스』는 한때 반역자를 가차 없이 물리치는 용맹한 전사였지만, 마녀들의 불온한 예언에 유혹되어 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찬탈한 스코틀랜드의 영웅 맥베스의 비극적 몰락 과정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렇다.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란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내재한 뿌리치기 힘든 욕망이며,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을 드러내고 실현하려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순식간에 추한 것이 되며 이것이 인간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아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권력욕으로 인간사 혹은 세상사의 비극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비극은 물론이고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맥베스라는 인물만 해도 그렇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주인공 중에서도 권력의 잔인함을 실현하려는 악한이다. 그런데 그는 악한이라고 치부하기엔 거의 고뇌하는 사색가, 심지어 진정한 구원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신학자의 모습까지 지니고 있다. 그저 권력욕에 가득 찬 폭군이라 단정하기에는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을 오가는 그의 사색이 너무 번다하거나 깊고 진폭이 크다. 도대체 그(맥베스)는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그는 권력(왕권)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악마는 디테일에 존재한다는 말처럼,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렇게 그를 방황하게 하는, 내면의 모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를 어떤 선택으로 이끌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논쟁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논쟁은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논쟁이다. 예를 들어 『베니스의 상인』 으로 셰익스피어의 인종주의(반유대주의)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그의 작품이 당대의 지배세력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비판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신역사주의’의 입장에 선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그들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당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왕권을 신비화하고, 지배 세력의 담론을 강화시킨 편견에 사로잡힌 작가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작품이 『맥베스』 이다. 그들의 주장이 물론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맥베스』 는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영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제임스 1세 치하에서 그의 처남이자 덴마크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4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궁정에서 초연된 것으로, 표면적 얼개는 ‘국왕 시해와 왕권 찬탈이 부른 국가적 무질서와 찬탈자의 파멸’이며, 그러므로 당대의 지배담론인 절대권력으로서의 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여지는 없을까. ‘왕의 남자’들[실제 제임스 1세는 셰익스피어가 속한 극단을 ‘왕의 극단(King’s Men)’이 되게 했다]이 왕 앞에서 한 편의 연극을 한다. 주제는 누가 보아도 왕을 참살하고 스스로 왕이 된 반역자가 결국은 영국 왕의 지원을 받은 세력에 스코틀랜드 망명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질서가 회복된다는 이야기이다. 극 중 인물인 장수 뱅쿠오(맥베스를 죽이는)를 전설적 조상으로 삼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가 출신인 제임스 1세는 분명 박수를 쳤을 것이고 함께 본 지배층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석연찮은 점이 남는다. 왜 연극의 주인공이 맥베스를 죽인 뱅쿠오나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왕이 되는 맬컴이 아니고 반역자인 맥베스인가. 배신을 서슴지 않은 왕권 찬탈자로 간주해 버리기엔 맥베스라는 인물이 너무 복잡한 깊이를 지닌 인물이 아닌가. 또 한 왜 하필이면 ‘비극’인가. 반역자를 처단하고 왕권을 회복한 영광스런 역사를 왜 비극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려 했을까. 단지 새로운 통치자 제임스 1세의 비위를 맞추거나, 야만스런 중세 족장들의 공동체 사회가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도움으로 복음화(문명화)된 것을 찬양하기 위해 그토록 현란한 상황을 연출하고 수많은 역설적인 대사가 동원되어야 했을까. 작품이 지니고 있는 기이함, 여전히 많은 비평가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수수께끼들 안에는 혹시 왕의 남자 셰익스피어가 감춘 또 하나의 칼날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스코틀랜드의 영웅 전사를 반역자로 만들었던, 아름다움을 추한 것으로 전락시켰던 권력에 대한 욕망을 해부했던 셰익스피어의 질문은 고스란히 현세의 권력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폴 A. 캔터의 책 『맥베스―양심을 지닌 아킬레스』는 바로 이와 같은 의문들에 해답을 주는 텍스트이다. 그는 처음부터 신역사주의 비평들과 선을 분명히 그으면서 이렇게 묻는다. “정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은 『맥베스』가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냐이다. [우리는] 자코비언 정치의 왜곡된 면을 찾아내기 위해 그 극을 살펴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맥베스』는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정치 현실을 그리고자 했던 셰익스피어의 많은 시도 가운데 하나인가?” 그렇게 물은 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역사관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역사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셰익스피어는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고 특정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그려내려 했던 것이고, 이 인물들의 비극을 통해 동시대에 대해 자신의 메시지를 던지려 했던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맥베스, 아킬레스로 남을 수 없었던 영웅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대부분 그것의 바탕이 된 원전이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등이 그러하며, 『맥베스』 는 라파엘 홀린셰드가 쓴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연대기』 의 스코틀랜드편의 ‘맥베스 전기’를 바탕으로 하여 쓴 것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원전을 그대로 카피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 기록들이 말하는 그 시대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당대인 16세기의 관점에서 사람(관객)들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 맥베스에서 과거의 특정 시점이란 기독교가 북유럽의 이교도 세계에 침투했던 먼 과거의 한 순간이다. 스코틀랜드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로마제국의 영국 점령기인 5세기부터 시작되어 거의 10세기까지인데, 맥베스는 11세기의 인물이며 이즈음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복음화가 완결되어가는 시점이다. 희곡 『맥베스』에 처음 등장하는 맥베스의 모습은 반역자들을 서슴없이 베어버리는 영웅 전사, 혹은 전쟁기계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것은 마치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전쟁터에서 돌아오면서 만나게 되는 마녀들은 그에게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이 마녀들의 예언은 그의 내면의 욕망을 깨우고 그는 번민에 빠진다. 이 경우 아킬레스라면 어떨까. 권력에 대한 욕망에 따라 왕을 단숨에 베거나, 유혹을 뿌리치고 진정한 영웅으로 남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맥베스의 경우 처음부터 이상한 태도와 독백에 빠진다. 무언가 그를 둘러싼 상황이 아킬레스가 살던 상황과 다른 것이다.

 

이미 세상에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만연하고, 그의 야망에 이 기독교의 영향이 개입하여 그를 깊은 고뇌와 갈등에 빠지게 한다. 만일 그가 이교도 맥베스라면 단칼에 왕을 죽였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도 맥베스였다면 아예 왕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교도 영웅은 충돌하는 삶의 두 가지 양식(가치) 사이에 끼어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이교도 영웅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무한한 욕망을 지닌 폭군으로 변해 가는가.

 

헤겔은 『`미학 강의』에서 비극의 핵심을 여러 인륜적 가치들 간의 충돌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비극은 두 가지 중요한 입장이 만들어내는 갈등인데 이 중 하나의 입장에서 행동하다 보면 다른 입장에서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갈등은 주인공의 몰락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이러한 헤겔의 비극론은 역사 속 비극들을 통찰하는 가운데 비롯된 것으로 주로 패러다임의 변화 중에 발생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이다. 『맥베스―양심을 지닌 아킬레스』에서 저자 캔터는 헤겔과 유사한 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헤겔이 말한 바대로 바로 격변기의 충돌하는 두 가지 삶의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맥베스는 전사이자 영웅으로서 자신 안에 움튼 권력에 대한 욕망과 싸운다. 그는 전사로서 새 종교의 온유나 나약함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반해 은밀히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는 도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 행동의 도덕적 차원을 인식하고 있다. ‘양심을 지닌 아킬레스’―기독교에 노출됨으로써 그의 영혼에서는 분열이 일어났고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양심’ 혹은 어떤 복잡한 자의식과 싸우는 아주 풍부한 심리적 내면을 지닌 인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대단히 비극적 인물로 만들어 준다.

 

한편 기독교가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양심만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의 구원과 유사한 상태인 완전무결함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함, 그리고 영원성을 갈망한다. 던컨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마침내는 일시적인 존재인 자연을 경멸하면서 초자연적 존재(마녀와 그들의 예언)에 매달리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현세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후에도 그것이 유지되는 절대 권력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그는 전쟁터에서 이기느냐 지냐는 자신이 용감하게 싸우냐 아니냐에 달려있다는 호메로스의 영웅들과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거(섭리)라면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양심을 거부하고 잔인한 폭력을 휘두른다. 나아가 자연의 질서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규정하고 행동에 제약을 주기 때문에 폭군으로서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거는 자연 자체와 불화를 겪게 된다. 기독교가 이교도 정신의 잔인함을 약화시켜 주기는커녕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그것을 더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본래의 이교도 정신에 기독교의 절대주의와 영원성 개념이 혼종되어 맥베스라는 인물을 더 잔인하고 유혈적인 인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과 그의 왕권 찬탈과 폭력의 정치는 궁극적으로 야만스런 중세 족장들의 공동체 사회를 붕괴시키고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도움으로 복음화 과정을 완결 짓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기독교의 영향이 이교도 전사에게 미친 이 아이러니한 결과(비극)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맥베스의 비극은 근대의 비극에 대한 예시

 

『맥베스』가 이와 같이 이교도 전사 영웅 맥베스가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에 영향을 받아 혼란을 겪고 분열되는지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16세기의 동시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오랜 셰익스피어 연구자로서 폴 A. 캔터가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온 것은 서구 사회에 기독교의 출현이 가져온 변화와 혼란이고 이 격변기 속에서 겪는 인간의 비극이다. 그는 맥베스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의 주인공인 햄릿 역시도 이교도적 영웅과 기독교적 영웅 개념 사이에서 분열된 존재로 해석했다. 셰익스피어 로마 비극 연구의 이정표가 된 『셰익스피어의 로마』에서도,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로마 3부작: 고대 세계의 여명』에서도 캔터는 셰익스피어가 로마 비극에서 단순히 주인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에 초점을 두고 기독교의 출몰과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어떻게 로마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이 형성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셰익스피어가 그리고 있는 모든 비극적 주인공들은 역사 전환기에 끼인 존재들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 혹은 가치관의 출현에 직면해 정반대인 두 가지 삶의 방식에서 비극적 선택을 한다. 기독교는 인간성의 가치와 공동선, 현세의 가치를 넘어선 궁극적 구원과 해방이라는 미래적 관점을 인류 사회에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권력에 대한 절대성과 무한한 욕망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해 오기도 했다. 그것이 얼마나 전쟁을 더 잔혹하게 하고 끔찍한 것이 되게 했는지는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근대(자본주의)를 넘어 오늘의 세계 체제에 이르기까지 재현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살던 16세기의 관점에서 비극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비극 작품들을 쓰던 때는 한편으론 과거의 안정적 토대에 더 이상 기댈 수 없고 새로운 시대를 불안과 희망으로 받아들이던 과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엘리자베스 치적 이래 국가적 흥륭과 경제적 번영이 시작되던 때이기도 했다. 절대 왕정이 근대의 여명을 열던 이 시기에 그는 과거의 역사와 인물이 감당한 비극을 통하여 현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또 다른 비극을 예감해 내고 이를 사람들의 인식 속에 하나의 경고로 심어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통치자인 제임스 1세가 좋아할 만한 주제―왕권의 신성과 정통성―를 다루고 있지만, 비극을 이끌어가는 패러독스라는 언어전략을 통해 이를 은밀히 해체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들에 내재하는 이 일관된 구조는 신역사주의 비평가들이 폄훼한 셰익스피어의 ‘보편성’을 오히려 입증해 주는 근거는 아닌가. 충돌하는 두 가지 상반된 삶의 양식 사이에서 언제나 비극적 선택을 하는 인간의 불행과 사회 안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벤 존슨의 예언 같은 말처럼 셰익스피어를 400년 전의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가 아니라 현대 세계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대의 극작가요 시인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일찍이 아놀드 하우저가, 그리고 저자 폴 A. 캔터가 이야기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 책 『맥베스―양심을 지닌 아킬레스』의 독서를 마친 독자들의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셰익스피어가 군주제나 시민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지 간에, 그 자신이 그처럼 많은 이득을 보았던 국가적 흥륭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도 비극적인 세계관과 깊은 비관주의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강한 사회적 책임감과 세상일들이 그렇게 다 잘 되어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확실히 혁명가나 투사형의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발자크가 시민계급의 심리를 폭로함으로써 자신이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게 근대 사회주의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듯이, 셰익스피어 또한 건강한 합리주의를 통해 봉건 귀족의 재등장을 저지시켰던 사람들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_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이교도 영웅이 어떻게 무한한 욕망을 지닌 폭군으로 변해 가는지를 묘사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해 보면 셰익스피어가 그린 맥베스의 모습은 과거에 대한 형상화인 것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적 묘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전사의 비극은 근대의 비극을 예시하는 것이다. 만약 맥베스가 지상에서 천국을 가지려던 자신의 개인적 소망을 이 지상에서 정치적인 것, 즉 소위 이데올로기로 바꿀 기회를 발견했다면 그는 분명 근대 폭군의 완벽한 원형이 되었을 것이다.”

_ 분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