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주제들 1) 

장 볼락 ​(지은이)  I  윤정민 (옮긴이)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도르노의 저 유명한 명제는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 이후 이렇게 수정된다.

 

“고문당한 자가 비명 지를 권한을 지니듯이, 끊임없는 괴로움은 표현의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부정변증법』, 1966)

첼란 시의 아픈 ‘비의(秘義)’ 속을 걷다

 

단지 아우슈비츠를 대표하는 시인을 넘어 시적 언어의 가능성을

현대시에 남겨두었다고 평가받는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

거부할 수 없는 매혹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몰이해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허위의 세계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보여주었던영원한 이방인.

몇 권의 시 선집으로만 알려진 그와 그의 시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을 이제

비로소 우리는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왔네, 왔네.

말 하나가 왔네, 왔네,

밤을 가로질러 와,

빛나고자 했네, 빛나고자 했네.

―파울 첼란, 「스트레토(Engführung)」 중에서

 

말(詩) 하나가 왔(었)다. 밤을 가로질러. 그 말이 어떤 밤을 가로질러 왔는지, 그 어떤 밤에 대해, 우리는 어렴풋이 알 뿐이다. 그런데, 대체 여기서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며,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파울 첼란과 그의 시를 두고 던져보는 말이다. 그의 시는 한 번 접하면 기묘한 울림으로 매혹시키되 동시에 짙은 안개 속에 우리를 가둔다. 그 밤-안개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늪에서 올라온 그 말은 리듬을 타고 오다가 뚝 끊어지고, 말이면서 말이 아닌, 침묵 직전의, ‘나머지 없는 나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 사라짐에 대해,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한다.

 

우리는 그의 시가 아름답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그가 가로질러 온 밤(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가혹한 운명)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시는 지독한 난해함과 더불어, 아름답지 않다. 프리모 레비가 말했듯이, 이미 죽어 있는,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지막 헐떡임 같은 그의 시가 아름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아름답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에게서 빌리자면, 그의 시들은 ‘반딧불의 잔존’과도 같다.

 

말 하나가 밤을 가로질러 와 빛나고자 했다. 그 말은 빛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졌음에도 그 말은 빛과 함께 잔존한다. 이 잔존하는 빛에 대해 숱한 사람들이 이야기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다. 아도르노에서부터 자크 데리다, 사사키 아타루에 이르기까지.(사사키 아타루는 아예 첼란의 시 구절을 책 제목으로 삼기도 한다.―“잘라라, 기도하는 손들을”)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은 이곳의 우리에게 소문으로 머물 뿐이다. 우리에겐 그의 시 몇 구절이 남아 있을 뿐 아직 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파울 첼란은 자신의 시를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로 비유했다. 그 유리병은 아직 닫힌 채이고 우리는 여전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장 볼락의 이 책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첼란의 시-편지의 수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속에는 첼란의 시에 대한 숱한 오인과 오해에 대한 해명과 반박이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전제들이 설명되고 있다. 이 책과 더불어 읽기를 포기한 그의 시집을 다시 펼칠 때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그와 우리의 차이는 바다처럼 클 터이지만, 우리 역시 재난 ‘이후’를 (어쩌면 재난의 한복판에) 살고 있으므로, 지금이야말로 그를 읽을 때이다.

 

 

“물구나무서서 두 손을 짚고 걸어가는 사람,

그에게는 하늘이 발아래 심연으로 있습니다.”

―파울 첼란, 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연설 「자오선」 중에서

 

파울 첼란의 시 문학처럼 완강한 몰이해의 장벽에 겹겹이 갇혀 있었던 경우가 달리 있을까. 그것은 우선 그의 삶이 처한(그가 받아들였던) 모순된 운명에서 기인한 바 클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저자인 볼락은 이런 물음으로 서두를 뗀다. “파울 첼란은 동화된 유대인이었을까요?” 이 물음이 던지는 사고의 파장은 크고 복잡한 것이다. 첼란은 독일어로 쓰를 썼다는 점에서 독일시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를 독일시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다른 존재이고자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바 유대인 시인도 아니었다. 또한 그는 동화된 독일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볼락은 말한다. “첼란의 언어가 시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은 ‘유대인’다운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라고. 볼락은 그것을 ‘대항하는 유대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렵다. 첼란의 말을 직접 가져와보자. “어쩌면 저는 유럽에서 유대 정신성의 운명에 따라 끝까지 살아야 하는 마지막 이들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그것이 많은 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다”라는 말도 있다. 이 말에 대해서도 첼란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다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첼란의 이 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로 조르조 아감벤의 「이집트에서의 유월절」이란 글이 있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절기를 이집트에서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뒤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 땅에 이스라엘국가를 건설한다. 체르노비츠 출신의 떠돌이 첼란은 이 유대인의 나라로 떠나지 않고 유럽에 남는다. 유럽은? 유럽(특히 독일)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만행을 반성하려 했지 오랜 반유대주의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 파리의 변두리 퐁투아즈에 첼란이 있었다. 전후 부흥기, ‘황금빛 서구’의 변두리에서, 누구도 그의 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그곳에서, 본질적 의미에서 이방인으로. 스스로를 ‘유대놈’이라 부르며.

 

「죽음의 푸가」가 그의 이름을 독일 문단에 알렸지만, 독일의 내로라하는 문인, 지식인들은 그의 시를 대놓고 비웃었다. 한편에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의 저 유명한 명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시)의 불가능성이란 핑계를 대며 이 명제 뒤에 숨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전후를 풍미한 ‘반성으로서의 리얼리즘’과 쇼와의 ‘유일무이성’이란 유대인 주류집단의 완고한 배타주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동맹이 있었다. 그들은 첼란의 파리 망명을 그의 시가 리얼리티를 외면하고 프랑스의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로 후퇴한 증거로 너무 쉽게 간주했다. 섣부른 미학적 양식화가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잡담으로 타락시키고 아우슈비츠의 공포를 변형시킬 위험이 있다는 아도르노의 우려를 오독한 독일의 비평가들은 첼란의 시와 낯선 시의 선율을 그러한 사례로 지목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대한 아도르노의 사유는 전범으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 사유를 가로지르는 「죽음의 푸가」의 시어들은 과도한 문학화로, 기껏해야 받아들일 만한 위험하지 않은 문학으로 분류한 뒤에야 자신들의 문학에 편입시켰다.

 

첼란의 독일어는 ‘다른 독일어’였던 것이다. 아감벤이 ‘독일어에 대한 특별한 언어조작’이라고 불렀던, 독일어 속에, 릴케와 호프만스탈의 언어 안에, 유대인의 전통을 위한 장소를, 아포리아를 만들고자 했던 첼란의 필사적인 시도는 적어도 동시대에는 몰이해의 벽에 부딪혀 좌절했다. 장 볼락은 이렇게 말한다. “첼란의 시 문학은 자신의 시대와 문화적 환경에 전승되어온 서정시의 언어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첼란은 이 언어를 동시에 해체하지 않고서는 사용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일찍이 습작을 하면서 리듬을 재수용할 때, 릴케와 게오르게 혹은 다른 선배 시인의 언어가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후배의 입장에서보다는 외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외부인으로서 언어 안으로 침입할 수 있었고, 언어의 심층적 차원을 해체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제 이 ‘외부인으로서 시인’ 파울 첼란의 시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조금 열린 듯하다.

 

 

어쩌면 말해도 되겠지요. 한 편 한 편의 시에는 그것의

‘정월 스무날’이 적혀 있다고. 어쩌면 오늘날 쓰이는 시들에서 새로운 점은

바로 이것 아닐까요?

―「자오선」 중에서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독자는 “어떻게 텍스트의 자율성, 자율적인 텍스트의 현실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들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쉽지 않은 숙제 앞에 놓인다. 그 자체로 이해 가능한 혹은 가능하지 않은 텍스트를 전기(傳記)적 사실들로부터 분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대표적으로 하이데거와 가다머)을 강령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 두 측면을 같이 놓고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바로 후자가 이 책의 저자 볼락 교수의 확고한 입장이다. 예컨대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너는 무성한 귀 기울임 속에 누워 있네, / 덤불에 에워싸여 눈송이에 에워싸여”와 같은 시구에서 그 두 측면, 즉 자율적인 텍스트의 현실과 나치 수용소의 현실 혹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동등하게 재현되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그 자체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첼란이 죽은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현재, 문헌학적 자료들이 제공되는 범위에는 한계가 거의 없는 듯하다.(물론 한국적 현실은 예외다.) 완성된 시 작품들을 개인적인 사실들과 지성적 배경과 관련지어 볼 수 있게 된 것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풍부하게 제공되고 있는 개인적 삶의 자료화 작업이 기존의 해석학적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자료는 스스로 말을 하지 않으며 해석은 여전히 맥락에 달려 있다. 자료화가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자료들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해석적 접근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의 선험적 검토가 시의 유일한 내용이다.” 볼락의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시가 본래의 지시관계의 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시의 유일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볼락은 시에 대한 단순하고 무비판적인 감상이 서로 대립하는 수많은 증거들을 무시해 왔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첼란의 시는 시 문학으로서 인정받음으로써, 바로 그 때문에, 처음부터 독자에게 친숙한 상투적인 지평 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시가 갖는 차별성과 극단적인 자유에의 요구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폭력과 몰락, 그리고 민족 말살의 경험에 대한 암시들이 형식적으로 고려되었을 때조차도. 볼락은 첼란에게 있어서의 새로움은 자신의 역사성을 성찰하는 과격함에 있으며, 텍스트를 비로소 확립하는 관점으로서 그(텍스트) 안에서 어떤 시각의 방향을 가려내는 데에 있었다고 말한다. 첼란이 유대인으로서 수치를 느끼기보다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율(Autonomie)을 표방하겠다는 중대한 결단에 근거한다. 자율은 태생의 배경이나 종교와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성,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과 관련되기 때문에, 첼란은 오히려 이 자율을 더 드러내 보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첼란이 ‘스스로의 문제’로 생각한 것, 이 자율을 형성한 ‘특수한 것들’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서 볼락은 ‘근원으로서의 역사성’에서부터 그의 모어로서의 독일어(유대인의 독일어), 문화적 유대감, 그리고 첼란 시 문학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사건의 성격까지 첼란의 시와 삶의 역사를 하나의 사유-세계 안에 포착할 수 있는 해석학적 조건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지배하는 주체가 말을 한다. 첼란은 유명한 「자오선」이란 제목의 수상연설에서, 시란 바로 되풀이할 수 없는 시간이 만들어낸 ‘존재의 경사각’ 아래서 말하고 있는 사람(주체)들의 ‘현존의 기획’이며, 또한 그러한 너(타자)를 향한 말 걸기이다. 누구에 의해, 어떻게 하여, 이 말걸기는 묵살되어 버렸는가. 볼락의 지적처럼, 어째서 시 안에 있는 비탈에 선 존재들의 이 내재적이고 자기목적적인 어둠은 간과되어 버리고 시의 신비적이고 비의적인 시 항목으로 분류되고 그 속에 갇힌 채 마치 뚜껑을 덮고 못으로 박아놓은 듯이 닫혀버리고 말았는가.

 

첼란은 앞의 연설에서, 우선 “낙원으로 도피 중”이며 “시계와 달력을 모조리” 깨부수거나 금지시키는 예술을 비판하면서 시는 ‘날짜(日子)’를 기억하는 행위이며 거기에 주목하고 그것을 기억하는 집중이라고 말한바 있다. “주목이란 영혼의 자연스러운 기도이다.” 발터 벤야민의 카프카 에세이에 나오는 말브랑슈(Nicolas De Malebranche)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한 편 한 편의 시에는 그것의 ‘정월 스무날(이른바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의 날이 1942년 1월 20일이다!)’이 적혀 있다”는 그의 말은 자신의 시를 ‘초현실주의’로 분류해 버리는 몰지각에 대한 단호한 비판이자 절규였다. 이 절규는 그의 육신과 함께 센느 강으로 뛰어들었다. 사사키 아타루는 재난 ‘이후’야말로 첼란을 읽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의 시와 함께 거기에 적힌 시간(날짜)도 다시 불러내야 한다. 그것은 가망 없는 시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되풀이할 수 없는, 반복될 수 없는 그 시간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는 무엇이고 철학은 또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