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게르하르트 슈페벤 호이저 지음 / 한상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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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어도어 아도르노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신칸트주의에서 출발하여, 후설 현상학의 완성을 거쳐 한편으론 루카치, 블로흐 그리고 벤야민과 같은 철학적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와 키르케고르로 이어지고 무엇보다 헤겔, 맑스 그리고 니체를 향해 갔던, 그리고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에서 정점에 올랐던 아도르노 사유의 방대하고 복잡한 철학사적 짜임은 그러한 철학들에 대한 사전 이해가 빈곤한 우리로서는 접근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난해한 ‘고전’으로만 여겨지던 아도르노 사유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철학적 입문서가 출간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의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원제: Theodor W. Adorno zur Einführung)』는 20세기 독일의 비판이론 철학을 이끌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그것의 극복을 위해 철학과 사회학, 예술과 문화, 음악과 문학 미학에서 전방위적으로 예리한 사유를 펼쳤던 아도르노 철학을, 『미니마 모랄리아』와 『부정변증법』, 『계몽의 변증법』을 포함하여 그의 주요 텍스트들을 종횡무진 오가며 그의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유의 건축물의 구조를 이루는 핵심적 모티브들을 중심으로 규명해 낸다.

아도르노는 언제까지 난해한 “고전”으로 남을 것인가?

 

최근 몇 년 사이,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저작들이 활발히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20세기 현대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대변하는 독일 비판철학을 이끌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그것의 극복을 위해 철학과 사회학, 예술과 문화, 음악과 문학 미학에서 전방위적으로 예리한 사유를 펼쳤던 아도르노 철학의 전체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뒤늦게나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의 축적이 우리 사회의 빈곤한 철학과 사회 이론의 개선과 연결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남아 있다. 원전의 출간 못지않게 이러한 원전에의 접근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신뢰할 만한 2차 저작물들의 번역과 출간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특히 아도르노의 비판철학은 난해하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신칸트주의에서 출발하여, 후설 현상학의 완성을 거쳐 한편으론 루카치, 블로흐 그리고 벤야민과 같은 철학적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와 키르케고르로 이어지고 무엇보다 헤겔, 맑스 그리고 니체를 향해 갔던, 그리고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에서 정점에 올랐던 아도르노 사유의 방대하고 복잡한 철학사적 짜임은 그러한 철학들에 대한 사전 이해가 빈곤한 우리로서는 접근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번역의 곤경”이라는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일각에서는 “아도르노는 아직 한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라는 자조적인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난해한 ‘고전’으로만 여겨지던 아도르노 사유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철학적 입문서가 출간되었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의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원제: Theodor W. Adorno zur Einführung)』가 바로 그것이다.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에서 아도르노 철학의 중심적인 내용들을 설명해 내는 그의 솜씨는 그간 시도된 아도르노 해설서와는 차별성을 갖는 탁월한 것이다. 저자는 비록 이 콤팩트한 해설서에서 아도르노 철학의 사상사적 짜임 전체를 그려 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밝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지적 기반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별 능력을 통해 아도르노 사유의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유의 건축물의 구조를 이루는 핵심적 모티브들을 추려 내고, 『미니마 모랄리아』와 『부정변증법』, 『계몽의 변증법』, 『신음악의 철학』 등 아도르노 텍스트들을 종횡무진 오가며 그것들의 의미를 규명해 낼 뿐 아니라 아도르노 철학이 가진 동시대적 의미를 현재화한다.

 

책의 구성에 대하여

 

슈베펜호이저는 8개 장의 주제를 설정하고, 각각의 장에서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해설(해석)한다.

 

짧은 전기적 형식을 취한 1장 “유년기를 새로이 붙잡으려는 시도”에서는 토마스 만의 ‘증언’을 빌어 아도르노의 정신적 특징과 그를 둘러싼 시대적 조건, 정신적 교류들을 스케치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망명 생활의 경험을 통해 강화된 아도르노 사유의 자기성찰이다. 민주주의가 게임의 규칙으로도 작동하지 않게 된 독일과 미국의 일상적/실용적 민주주의의 대비, 또한 대중문화 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한 미국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 그리고 1950년 미국에서 출간된 획기적인 저작 『권위주의적 성격 연구』를 통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사회 자체의 양가성을 통찰한다. 그에게 문화의 내적 모순이란 그것이 비인간적인, 억압적인 사회구성체의 토대 위에서 인간성을 약속한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 문화산업으로서 상품생산의 규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릴 때 자신을 스스로 부인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역사의 경험이 발생했던 장소에서 비판적인 이론적 노동이 이어져야 하고, 자신의 경험이 그 핵심을 이루는 바로 그곳에서 무언가를 바꾸고자 시도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 아래 귀국한다.

 

아도르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망각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망각의 시도는 “과거의 극복”이라는 미명 하에서, “틀을 갖춘 사회”라는 모토 아래의 사회 재건과 경제 기적을 가로막는 방해물들을 제거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아도르노의 “비판”철학이 더 첨예화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2장 “비판”과 3장 “이성의 자기비판”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아도르노 철학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비판”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칸트의 비판철학과 헤겔 변증법의 긴장 속에서, 그리고 맑스의 급진적 역사철학의 계승과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전개한다. 이와 함께 슈베펜호이저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비판철학의 전개가 68 학생운동의 ‘실천 숭배’와의 첨예한 갈등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려 준다. ‘비판의 억압’뿐 아니라 ‘비판의 기능화’가 양립하는 현실에서 사유 자체의 본질적 측면으로서의 비판을 구제하려는 아도르노의 말년의 노력은 “비판에 대한 독일적 선입견”과 위험스러운 “권력과의 동일시”로 이어지는 동일성에 맞선, ‘현존하는 부정성에 대한 규정적 부정’을 현재화하는 투쟁이었다.

 

이어지는 4장에서 슈베펜호이저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부정성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희망을 상실한 것들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그것의 가능성/불가능성을 아도르노가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해명해 나간다. 그것은 “상처받은”, 소외된, 전적으로 허위적인 삶 속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윤곽을 부정을 통해ex negativo 규정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구원”을 사유할 때, 벤야민과 달리, 피안의 구원을 초래할 메시아주의적 초월성의 개입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의 해결책을 하나의 아포리아(난점)로 정식화한다. 이러한 고유한 난점을 그 자신의 자기반성 속으로 함께 받아들이는 그러한 사유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출발하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기획이 관념론적 변증법에 대한 규정적 부정에 다름 아니며,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현상학의 완수라는 그의 철학적 출발점을 형성하는 모티브들과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타난 합리성의 자기비판이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을 설명해 나간다.

 

『부정변증법』과 『계몽의 변증법』이 전개한 동일시를 강요하는 합리성에 대한 자기비판은 “총체적으로 사회화된 사회”에서의 “개인의 소멸”이라는 문제로 나아간다.[5장] 철학이 “동일성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맑스의 용어로는 사용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면, 철학은 자신의 표현 방식을 변경해야 하며 이로부터 철학은 그 스스로 사회 이론으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이것은 이도르노의 비판철학이 사회 이론과 정치철학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개인Individuum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비판이자 구원으로 파악한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개별화Individuation 원칙의 실체화에 대한 비판이자, 이 원칙에 보존되어 있는 참된 인간적인 내용의 구원이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에게 중요했던 것은 개별성Individualität의 저항적 잠재력을, 이 범주가 그 실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포착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아도르노는 프로이트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치료술로서의 정신분석학”을 가차 없이 비판하기도 한다. 어울러 개별화 원칙의 발생에 관한 아도르노의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분석은 인간의 내적 자연에 대한 폭력적 형태의 규율화에 관한 담론 분석적 재구성(미셸 푸코)이 곁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이 개인의 종말을 불가역적 과정의 결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행위자로서의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 최종적 결정권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그것이 모든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규범적으로 올바른 행위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실천의 반反사실적 척도로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도르노의 부정적 도덕철학의 규범적 이원론이다.

 

아도르노에게는 선명히 그려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더 나은 상태의 이미지를 공언하는 것을 거부했다. 언제나 반복해서 그는 구약성경의 ‘우상 금지 원칙Bilderverbot’이 다소간의 변형된 의미 속에서 철학적으로 그리고 사회 이론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도르노가 개별화 원칙이 “올바르게” 지양된 자유로운 사회를 어떻게 사유했는지가 5장의 내용을 이룬다. 유토피아에 대한 헛된 희망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에 대한 신중함, 그리고 자연을 황폐화하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대한 통제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생명에 대한 중요성을 획득하는 사회이고, 더 이상 궁핍을 알지 못하는 인류에게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까지 충족되었던, 그리고 부를 통해 궁핍을 확대 재생산해 왔던 모든 기획이 가진 광기와 덧없음에 대한 희미한 깨달음이 미치는 순간 사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책의 후반부인 7장 “아름다움의 무기력함”과 8장 “문화의 실패‘는 아도르노 사유의 현재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아도르노의 예술철학과 대중문화(혹은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는 장들이다. 아도르노가 미학 이론에 기울인 사유의 깊이와 가치를 역동적으로 설명해 내며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지닌 상황 인식의 한계까지 넘어서는 방향을 제시하는 저자의 해석적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위기와 구원을 함께 사유하는 철학의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는가?

 

슈베펜 호이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도로노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 아니라, 아도르노 철학의 “현재화”에 있음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려운 아도르노 철학을 읽어 내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을 터이므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아도르노 읽기에도 늘 떠올려야 할 문구일 것이다.

 

아도르노는 개인적 현존과 사회의 전체 상태 사이의 간극에 대한 절망적 경험을 정교하게 첨예화했다. 사회의 몰락은 개인의 집단적 제거 속에서 성큼 다가왔다. 사회적 사건의 완전한 광기 속에서는 사물화된 인간들뿐 아니라 사물들조차도 그 참된 존재의 권리를 빼앗기며,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될 뿐이다. 그러나 올바른 삶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잔혹한 통찰로부터 삶의 가능성을 완전히 끝내지 않기 위해 주체에게 필요한 어떠한 힘이 자라날 수 있다.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단호한 부정성의 의식 속에서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을 붙잡으려는 시선 이외에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어떠한 위안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도르노의 모든 이론적이고 미학적인 작업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핵심적 모티브다. …… “희망을 상실한 것들의 구원”을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 모티브”로 고찰한 아도르노는 어떻게 개별적인 것, 덧없는 것 그리고 위험에 처한 것을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이를 통해 세계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개념화할 수 있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몰두한다.―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