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김은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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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니체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자신만의 포스트-근대 철학의 경지를 개척했던 질 들뢰즈의 행동학이 제안하는 ‘되기devenir’ 개념에 착안하여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그 실천적 의의를 규명해낸 페미니즘 철학서 한 권이 출현했다.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되기’ 개념의 윤리적 의미와 정치적 함의를 샅샅이 살필 뿐 아니라, 그것이 페미니즘 주체화와 교차하는 위치를 조명함으로써 동시대 페미니즘을 여성만의 운동이 아닌 연대의 정치운동으로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차이를 역량으로 삼고 체현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집합적 여성 주체의 가능성을 탐구한 로지 브라이도티의 논의까지를 통과한 결과이다. 페미니즘 철학을 철학의 여러 분과 중 하나로나 간주하는 척박한 풍토에서 페미니즘 철학이 단지 안티의 수준을 넘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명할 인식의 무기로 등장하게 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값진 성과이다. 게다가 학술서이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윤리적 세계에서는 언제나 능력과 역량이 문제이며,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즘 철학은 가능할까? 잘해야 페미니즘 철학을 철학의 여러 분과 중 하나로나 간주하는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철학이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페미니즘 철학이 기존의 견고한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어도, 그것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인식의 무기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까지는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적어도 한국에서)?

 

이러한 답답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결국 한국 페미니즘의 철학적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일 터이다. 이번에 출간된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은 이러한 역량을 타진해 보는 하나의 시험대이자 가능성이다. 이 책은 한국 철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질 들뢰즈와 그의 철학과의 긴장과 대결 속에서 새로운 여성 주체의 형상화를 모색했던 로지 브라이도티를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 안으로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동시대 페미니즘의 윤리적 정치적 방향 모색을 실험한 데 그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들뢰즈의 행동학이 제안하는 ‘되기’ 개념의 윤리적 의미와 정치적 함의를 밝히고, 그것이 페미니즘 주체화와 교차하는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동시대 페미니즘을 여성만의 운동이 아닌 연대의 정치운동으로 제시하는 철학적 모색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역량은 각각의 불안정한 조합을 통해 존재 속에 비할 데 없는 힘, 끈기, 투지를 가지고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책의 1부는 질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론, 그 가운데서도 행동학에 초점을 맞춘다. 들뢰즈의 존재론적 기획은 근대 주체의 도덕을 넘어서려는 니체, 스피노자의 분투를 계승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천 개의 고원』을 포함한 그의 철학 전체의 바탕을 이룬다. 그 가운데서도 들뢰즈는 존재하려는 능동적인 힘을 극대화하는 능력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을 행동학으로 칭한다. 그의 행동학은 정신-신체의 이분법 너머에서 신체를 새롭게 이해하며, 윤리학을 신체의 역동적 힘과 변이의 문제로 제시한다. 동시에 행동학은 각기 다른 신체의 능력을 활성화하는 차이의 역량을 인정하면서 상호 연결된 관계성을 생산할 수 있는 방식인 ‘되기devenir’를 제안한다. 여기서 되기는 보편성을 근거로 차이를 차별의 이유로 삼는 권력에 대항하면서 착취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옹호하는 방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들뢰즈의 행동학에서 차이는 동일한 것에 의해 규정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역량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다른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변이의 역량을 지닌 강도적intensive인 것이다. 강도적 차이를 통해 보았을 때, 윤리학은 ‘얼마나 변이할 수 있는가’라는 신체의 역량을 다루는 문제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신체는 정신과 대립하는 신체성이라는 실체적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인 변용 능력povouir d’être affecté을 의미하며, 윤리학은 바로 이러한 신체의 변용 능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행동학인 것이다. 이렇듯 윤리적인 것을 생명의 역량을 활력 있게 증강시키는 실천적인 행동학으로 이해한다면, ‘되기’란 주어진 정체성을 허무는 힘이며, 지배 권력의 보편적 기준을 획득하는 다수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방식을 발명해 내고 그에 대한 권리를 주창하는 소수적인 것을 지향하게 된다.

 

행동학은 신체를 수동적인 체념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변용 능력을 통제하여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논리에서 기인한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삶을 지속하고 증강시킬 수 있는 관계의 조직을 윤리적인 가치로 이해하고 그 실천적 의미가 되기 개념을 통해 제시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행동학은 이러한 신체의 변용 능력의 활성을 다루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변용 능력을 저하시키면서 자기 복종의 체제를 만드는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되기 개념은 탈정체화와 탈중심화를 실행하는 소수자-되기를 주장할 뿐 아니라 각기 독특한 신체들의 변용 능력을 긍정하며, 모두의 변용 능력을 증강시키는 능동적인 행위를 만들어 내는 관계성을 창출하는 실험을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되기는 남성, 백인, 이성애자로 표상되는 보편적 인간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오이디푸스 구조와 가부장제를 비판할 뿐 아니라, 차이를 역량으로 삼고 체현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여성 주체의 형상화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이론적, 실천적 논의와 맞닿아 있다.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아보자 .

비록 우리가 두 방울의 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하지만, 들뢰즈의 ‘되기’ 개념은 근대적 인간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급진적인 위치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성차sexual difference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그는 “각각의 모든 되기는 여성-되기를 거친다”고 강조했지만, 그에게 있어 ‘여성’이란 모호한 존재로 남아 있다. 저자는 이로부터 들뢰즈의 되기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여성-되기 개념을 거쳐 여성 주체의 발명을 모색하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긍정의 윤리학’을 검토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되기 개념 중 특별히 여성-되기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페미니즘과 결합하여 그 의미를 해명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인다. 행동학의 이론적 의미를 살펴보는 1부에 비해서도, 행동학의 실천적 의미인 되기 개념을 페미니즘과 결합하여 다루는 2부는 바로 그러한 간극을 메우고 페미니즘을 여성-되기이자 긍정의 윤리학으로 제시하려는 입체적 시도이다.

 

저자는 행동학과 페미니즘이 조우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삼아, 되기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여성 주체의 발명에 유용할 수 있는 브라이도티의 ‘여성-되기’논의를 주요하게 다룬다.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의 작업이 신체의 변용 능력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체현성을 둘러싼 페미니즘 논의에 유용한 시사점을 마련해 준다고 본다. 또한 여성 주체의 생산에 있어서, 들뢰즈의 되기 개념이 차이를 일탈이나 종속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역량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여성 주체는 탈육화된 정신 활동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특수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체현된 존재이다. 이러한 여성 주체는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신체들의 역량이 교차하면서 각기 다른 신체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신체들을 창출해 내는 여성-되기 과정 그 자체이다.

 

결국 여성-되기는 새로운 여성 주체를 어떻게 그려내고, 그 주체의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느냐에 그 의미와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브라이도티는 되기를 통해 생산되는 여성 주체를 집합적 신체이자 체현적 실재로 이해하면서 여성 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여성 주체는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고 변이하는 유목적 주체이다. 둘째, 여성 주체는 여성 간의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각기 다른 사회문제와 결합하여 연대의 역량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비단일적인 주체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여성 주체는 윤리적 주체이며, 페미니즘의 과제를 타자와 차이에 개방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긍정적인 힘 기르기empowerment로 역설한다.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 내의 다양한 차이들 간의 소통과 교섭을 위해서는 페미니즘에 새로운 윤리적 논의가 요청되며, 각기 다양한 맥락을 지닌 현장에서 비롯된 미시적이고 복수적인 요구에서 열린 보편성을 창출해 내야 한다. 여성 주체는 변이를 지속시킬 수 있는 능동적 힘들의 결합인 집합적 관계망이기에, 다양한 차이들을 능동적인 힘들로 창출하는 알맞은 윤리적 관계의 구축은 중요하다. 즉, 여성 주체를 윤리적 주체로 제안하고 지금의 페미니즘을 행동학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전회를 통해서 이해할 필요성이 페미니즘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성차화된 차이의 역량을 긍정하면서 저항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과 함께 삶을 지속할 수 있기 위한 공동체의 구축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도출하고 문제 제기함으로써 권리를 획득하며 규칙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을 의문시하며, 투쟁을 통해서 기준의 영역을 확장하는 동시에 기준의 안과 바깥을 설정하는 논리를 뒤흔드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브라이도티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지금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은 타자와 차이에 개방적인 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 기르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며, 페미니즘의 주요한 과제는 긍정적인 역량을 배양하는 관계의 집합체인 윤리적 여성 주체의 발명에 있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긍정의 윤리학으로서의 페미니즘을 가부장제의 차별에 저항하는 정치운동이자, ‘여성’이라는 젠더 범주를 넘어 인본주의적 전제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 양식과 대안을 창출하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운동으로 제안한다. 긍정의 윤리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고립된 운동 형식에서 벗어나 다른 사회운동과 더불어 연대하며,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 타자에 개방적이고, 미래 세대에 책임을 지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창출하려는 정치적 활동인 것이다.

 

 

“들뢰즈와 페미니즘을 엮어 내는 시간은 생의 위대한 건강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고적하고도 조용하지만 가장 강렬한 강도를 통과하는 시간이었고, 아주 단순한 사실을 알기 위해 분투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던 단면을 직시하여 삶의 변화를 그려 내는 시간, 우연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은 한마디로, 근대 주체의 도덕을 넘어서려는 니체, 스피노자의 분투와 들뢰즈의 존재론적 기획을 통과하여, 행동학과 교차하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페미니즘 기획을 새로운 윤리적 주체화로 구체화하려는 한국 제3세대 페미니즘 철학자의 야심찬 시도이다. 이는 근대적 주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주제 구조의 복잡성과 신체의 물질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유물론의 계보에 위치하는 이론임과 동시에, ‘차이를 지닌 여성들이 어떻게 함께 연대할 수 있는가’, ‘여성으로서 어떻게 발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신체와 물질에 드리워진 이분법적 사유를 “돌파하며 작업하는working through”는 새로운 사유를 제안하려는 안간힘으로 기억되고 참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