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천사들카프카, 벤야민, 숄렘에게 전통과 모더니티는 무엇이었나  

로버트 올터 지음 / 김재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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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 게르숌 숄렘―하나의 이름만으로도 쉽게 가늠되지 않는 깊이를 지닌,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삼각형처럼” 함께 놓인 제목의 책이 나왔다는 사실. 『필요한 천사들: 카프카, 벤야민, 숄렘에게 전통과 모더니티는 무엇이었나』는 굳이 요약하자면, “파국을 맞은 세계에 내던져진 20세기의 세 유대인 지성이 ‘진리’와 ‘계시’, ‘전통’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물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예리한 촉각으로 단서들을 모아 답을 찾아가는 드라마틱한 에세이의 연쇄이다.

 

전통을 산산조각 내며 폭주하던 모더니티(근대)가 만든 “파국”―실은 지금도 현재진행 중인―이 세 사람의 유대인 지성을 각기 전통과 모더니티의 한계 영역에 위치하게 했고, 이들 각자가 문학적 수단을 통해 모더니티의 딜레마들을 생애에 걸쳐 탐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 벤야민, 숄렘이라는 각각의 깊은 골짜기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들 세 사람의 상호 접합이 보여 주는 인식의 새로운 차원에 이르러 본 적은 없다. 30년 전에 나온 ‘명저’의 한국어 번역이―이 번역본에 ‘보론’으로 실린 문학 평론가 조효원의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바람과 역설과 아브라함에 대하여」와 함께―아직은 20세기의 빼어난 문학적-철학적 성취들의 저변에 흐르는 유대 정신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에게 인식의 새로운 자양이 되리라 생각한다.

파국의 폭풍 앞에 선 지성의 안간힘을 떠올리며

 

『필요한 천사들: 카프카, 벤야민, 숄렘에게 전통과 모더니티는 무엇이었나』의 표지에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그린 <설교 뒤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이란 그림의 일부가 담겨 있다.(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제목 그대로―『구약성서』의「창세기」에 나오는―형의 분노를 피해 달아난 야곱이 황야에서 지내다 한 ‘사람’을 만나 밤새도록 씨름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그(야곱)가 사투를 벌였던 ‘사람’은 정말 ‘천사’였을까, 아니면 그저 꿈속의 환상이었을까?

 

우리는 유럽의 근대(모더니티)가 20세기 중반에 어떤 파국적 상황을 맞이했는지 알고 있다. 또한 이 시대의 한복판에 있었던 발터 벤야민이란 예민한 지성을 기억한다면, 그가 애써 소장했던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이 열려 있는 채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날개를 펼친 이 천사를 가리켜 ‘역사의 천사’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했다. 그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 하지만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온다. 어쩌면 벤야민 자신의, 그 시대 지식인의 운명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모든 지식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겠지만)? 『필요한 천사들』의 저자가 말한다. 이 책이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 게르숌 숄렘, 이 세 사람 모두 벤야민이 읽은 클레의 〈새로운 천사〉와 비슷했다고. 역사의 폭풍이 모질게도 자신들을 기원들의 ‘에덴동산’ 밖으로 밀어 낸 상황에서 등 뒤에 남겨진 전통의 풍경을 돌아본 모더니스트였다고.

 

찢겨진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서

 

『필요한 천사들: 카프카, 벤야민, 숄렘에게 전통과 모더니티는 무엇이었나』는 카프카와 벤야민, 그리고 숄렘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사상가를 “삼각형 삼아” 이들의 상호 접합을 시도하면서 “파국을 맞은 세계에 내던져진 20세기의 세 유대인 지성이 ‘진리’와 ‘계시’, ‘전통’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비평적 에세이(게오르크 루카치에 따르면 비평과 에세이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이다.

 

하나의 이름만으로도 쉽게 가늠되지 않는 깊이를 지닌, 이 세 사람의 공통분모를 거칠게 요약하면, 세 사람 모두 강하게 동화된 독일어 사용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셋 모두 아버지의 문화 가치에 저항했다. 각자 무척 다른 길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은 아버지가 버린 유대 문화와의 진지한 마주침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 세 명의 독일계 유대인(「보론」의 필자의 표현에 따르면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 지성은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의 한계 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각자의 문학적 수단을 이용해 모더니티의 딜레마들을 탐지할 수 있었다는 점. 여기서 ‘한계 영역’이란, 앞서 말했듯이, 전통을 산산조각 내며 폭주하던 모더니티(근대)가 만든 “파국”으로 드러난 그 자리를 의미한다(이는 또한 숄렘이 지은 시의 표현을 빌자면, “신이 서 계시던 자리에 이제는 멜랑콜리가 서 있”는 시대를 가리킨다). 이데올로기의 살인적인 단순화가 역사적 현실을 도식화된 거짓말로 대체해 버린 시대에 전통과 모더니티의 한계 영역에서 이 둘 모두를 움켜잡으려 했던 이들의 지적 안간힘-기획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저항 행위, 전체주의가 영원히 말살하고자 한 풍부한 유산을 섬세하게 유지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실존을 전제로 저자인 로버트 올터는 카프카, 벤야민, 숄렘을 다시 읽으면서 현대 독일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 치열했던 포스트-전통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의식 구조들’을 일종의 현상학적 방식으로 탐색한다.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계시”, “신적 언어”, “[율]법”, “주해”같이 철저한 신학 범주들이 세 작가에게서 차지하는 중요성이다. 얼핏 20세기 이후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후퇴로 비칠 수 있는 이러한 실마리의 제시가 혹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은 이러한 신학적 개념들의 그물망 아래 펼쳐 보이는 저자가 지닌 해석의 능력이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의 논의의 예증적 근거들을 세 작가의 픽션, 비평적 종합, 역사 기술상의 주요 작품―당연히 이것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지만―보다는 편지, 일기, 노트, 금언적이고 단편적인 조각에서 찾아낸다. 그리하여 언뜻 부수적인 듯 보이는 세부―기이하게도 알파벳과 물리적인 기입 행위에 초점을 맞추거나 텍스트라는 발상 및 텍스트성이 진리의 수단이라는 관념에 매혹을 느끼거나 천사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세 사람의 상상력을 표시하는 일종의 워터마크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 작업을 따로 검토할 때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인식적 차원을 보여 준다. 다르게 말하면 유대 전통의 개념적・정신적 세계에 세 사람이 느낀 향수, 감상을 엄격히 배격한 이 향수가 어떻게 이들 글쓰기에 특유의 방향을 부여해 주었고 모더니티에 대한 우려에 특별한 날카로움을 더해 주었는지를 규명해 낸다(예컨대 지금까지 문학적 알레고리로만 해석되어 온 카프카 해석의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이는 획기적이다).

 

누가 스쳐가는 신의, 천사의 얼굴을 보는가

 

『필요한 천사들』은 길고도 두려운 세계대전의 시작이 어렴풋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암울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카프카를 두고 나눈 의견 교환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언어(전승으로서의 히브리어와 독일어) 사이의 긴장이 의미하는 바와, 텍스트와 해석(주해)를 둘러싼 상이하지만 세 사람이 추구한 공통성, 계시와 기억의 문제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역사의 천사에 대한 니힐과 갈망)을 안간힘을 다해 붙들려 했던 세 지성의 역설적 사유의 가치와 의미를 해명하려 시도한다.

 

로마, 예루살렘, 파리, 베를린이 불길에 휩싸일 위험에 처한 순간에 숄렘과 벤야민 두 사람에게 카프카 이해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성년이 되어 맞이한 새로운 세기에 이르러 오랫동안 믿음, 가치, 공동체를 지탱하던 구조가 산산이 조각났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 19세기 산업화와 도시화가 쌍둥이를 이루어 발휘한 내파력이 이 과정을 초래했다고 이해한 벤야민과, 유대 역사의 내적 흐름을 추적하면서 17세기의 메시아주의적 격변들과 그 여파로 생겨난 급진적인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에서 모더니티로의 파열적인 이행을 위한 하나의 대규모 패러다임을 보았던 숄렘, 이 두 사람 모두 인류가 형이상학적 나침반의 안내 없이도 실존의 황무지를 헤쳐 나갈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지혜를 공유하

고 궁극적 현실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의식하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역량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이 역사적 탈구 전체의 모순들을 회피하지 않고 포용하는 능력을 보유한 카프카의 문학적 텍스트들은 역설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역능의 단초였다. 카프카는 믿음에 닻을 내린 기원들의 세계와 절연하기를 거부하지만 그 세계의 위중한 몰락을 결코 기만하지 않는다. 픽션에서 카프카는 전통을 조롱하지 않으며 경건한 감정으로 전통을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일종의 도착적 숭배 속에서 전통의 제스처들을 재상연하고 변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 한가운데에서 유머의 가능성을 구해 낸다. 이것이야말로 숄렘이 발견하기를 희망하며 벤야민이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암시한 것처럼, 우리의 파악을 피해 가는 신의 얼굴 중 하나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는 유령의 집 거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파괴의 그림자 아래 세계가 진동할 때 착수해야 할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카프카와 벤야민, 숄렘, 이 세 사람 모두 유대 전통에서 예지적visionary 진리를 유지하는 힘과 본래성을 감지한 한편 이 진리와 이 본래성이 더는 접근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특히 언어의 측면에서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다는 감각이, 형식적이고 주제적인 층위에서, 카프카 픽션의 몽상적이고 비유담에 가까우며 서사와 양식 면에서는 인습 파괴적인 요소들에, 유대 역사에서 일탈이 중심을 차지한다는 숄렘의 한결같은 주장 및 ‘심연’이라는 규정 아래 그가 시행한 수많은 연구에, 벤야민이 금언적으로 표현한 전통의 몰락과 경험의 퇴락이라는 시야 및 “역사의 폐기물”을 역사의 숨겨진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로 이용하려는 그의 노력에 반영되어 있었다.

 

다시, “필요한 천사” 누구이며, 무엇인가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들―특별히 비유담―에서, 성서 텍스트를 다루면서 때때로 이 텍스트를 전복한다. 하지만 여러 비평가가 그러듯 우리 시대의 문학 용어를 사용해 카프카가 신학 텍스트를 ‘탈구축’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반대로 성서의 텍스트 구조가 카프카의 상상을 강제하고 있으며, 그는 이 텍스트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위해 그리로 들어갈 특이한 뒷문을 찾으려 한다. 아니면 벤야민의 은유를 활용해 이 뒷문이 자기 내면의 밀림에 이르는 길이 되는 방법들을 카프카가 찾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카프카가 다른 판본들에 등장하는 것과는 다른 아브라함을 찾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카프카의 아브라함은 속세라는 진창에 빠져서 신앙이 있지만 신이 저에게 말을 걸었다고address 믿을 자신감은 없으며, 신앙의 추문을 실행하려 시도했다가 웃음거리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이다. 저자인 올터는 “유대 신학의 희극적 측면이 카프카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벤야민의 제안이 여기서 아름답게 들어맞는다”고 해석한다. 부조리함을, 웃는 특징risibility을, 호모 시그니피칸스 즉 의미를 만드는 동물의 필사적인 집요함을 카프카만큼 기민하게 통찰한 소설가는 없었다. 기원상 신적인 [대문자] 발신자Addresser와 [소문자] 수신자addressee 사이에는 추문적인 틈이 생기며 텍스트 수신 행동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부조리가 되며 이해 불가능성에 휩싸인다. 그러나 불가해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계시는 긴요한 질문들을 영원히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바로 이를 두고 숄렘을 통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것이 언제나 기원적 계시의 모든 것, 제도화된 종교의 한층 안락한 경건함을 벗겨 낸 계시의 모든 것이라고.

 

카프카와 벤야민, 숄렘, 이 세 작가의 이 같은 기원들을 향해 돌아감 전체는 독일 부르주아 유산에 대항한 반란의 근본적 표현이었다. 카프카적 상상력의 통일성을 가늠하게 해 주는 척도 하나는 그가 최소한의 향수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기원들에 대한 이 긴요한 관심을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카프카를 비롯한 세 사람은 종교 전통과 현대 세속 문화 사이에 위치한 무인지대의 서로 다른 지점에 서 있었으며, 이 지점들은 셋 중 누구에게서도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 작가가 빛과 관련된 유대 전통 전승들에 사로잡힌 마당에 천사들, 때로는 명시적이고 때로는 변장한 천사들이 이들의 상상 세계를 부유했다는 사실에는 놀라운 점이 전혀 없다. 저자의 지적처럼 세 사람이 천사를 문학적으로 목격한 방식을 고찰하면 이들이 공유한 정신적 무인지대에서 이들이 제각기 서 있던 곳을 적어도 잠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에서 천사들은 전통적으로나 어원상으로나 전령messenger이지 벤야민은 〈새로운 천사〉를 명상하는 아홉째 테제에서 계시와 신적인 전언message의 영역에서 천사를 제거한다. 종교 상징주의 세계를 떠나 온 일종의 말문 막힌 난민인 천사는 천상과 지상 사이에 세워진 수직축이 아니라 낙원 같은 기원이라는 꿈과 역사의 오랜 파국 끝에 오게 될 것(그것이 무엇이든)의 상상 불가능한 풍경―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악몽으로 판명 날까?―사이에 놓인 시간축에 위치한다. 모더니티의 재난들―경험의 부식, 지혜의 퇴락, 구원적 시야의 상실, 그리고 이제 1940년대의 대량 살육의 보편적 지배 아래 천사는 ‘천사 인간’을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목격하고 있으며, 가상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물들을 바라보는 지독한 힘을 타고났다고 알레고리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카프카가 목격한 천사는 1914년 6월 25일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1인칭으로 쓰인 이 일기는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한 이야기 아니면 더 발전시키지 않고 정식 발표를 포기한 이야기의 초고처럼 보인다). 셋방 세입자인 화자는 들뜬 상태와 지루함을 동시에 느끼며 종일 방안을 왔다 갔다 한다. 저녁 무렵에 그는 보기 드문 사건을 목격한다. 반짝이는 커다란 날개를 단 천사가 금빛 실에 묶인 채 아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높이 쳐든 손에는 직선으로 길게 뻗친 칼이 들려 있었다. ……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는 천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페인트칠한 목재 선수상船首像에 불과했다(칼자루는 양초를 꽂아 흘러내리는 기름을 받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천사가 해방의 전언을 전해 주리라 기대한 주인공에게 좌절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야기는 천사의 참된 성격에 관한 티끌만큼의 가상도 없이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역설적인 반전Umkehr에 대한 암시 하나가 결론부를 배회한다. 무엇보다 일종의 기적 같은 현현이 있다. 천사는 빛 자체는 아니지만, 평범한 인공물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 천사는 어둠 속 영혼에게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는 도구는 되는 것이다.

 

독일 부르주아 동화주의의 현실 안주에 등을 돌린 세 사람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신학적 깊이를 지닌 유대적 기원들의 세계에 매혹되었다. 셋 모두 기원으로의 진정한 회귀는 불가능하다는, 한때 신이 서 있던 자리에 이제는 멜랑콜리만이 서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들은 천사의 형상을 수단 삼아 계시의 역설적 무를, 인간이 낙원에서 역사로 난폭하게 추방당했던 상황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의 가상성을, 그리고 그것의 흐릿한 존속을 상상할 수 있었다. 카프카, 벤야민, 숄렘을 삼각형의 묶어 사유를 전개하는 『필요한 천사들』을 통해 이 세 지성이 추구했던, 참고 견디면서 존속하고 있을지도 모를 무언가가 초월의 영역―전통이 그토록 절박하게 말 걸고자 했던―에서 빠져나와 여전히 희미한 빛을 깜빡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곳에서 우리 모두는 ‘단단한 땅 위에서 느끼는 뱃멀미’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카프카의 ‘꼴찌-아브라함’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분명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든 ‘일상의 유대인’ 혹은 잠재적인 ‘꼴찌-아브라함’들은 근본적으로 ‘행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다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혹시 이것은 ‘가장 안전한 길’일까 아니면 ‘가장 큰 재앙’일까? 아마도 우리는 끝내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동시대의 어느 벤야민 주석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어의 끝없는 혼란 속에 내던져진 채, 끝내 그 사실을 망각한 채로, 바벨탑 속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 중 누군가가 마치 바보인 척 혹은 취객인 척하며 전례 없는 엄청난 ‘꾀’와 ‘무모함’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횔덜린이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위험이 있는 곳에는 또한 구원자도 자라고 있다’고.”

―조효원, 보론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바람과 역설과 아브라함에 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