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멕시코
부정당한 문명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 지음 / 박수경 옮김

멕시코의 인류학자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는 지난 500년 동안 멕시코 역사를 “서구의 문명 프로젝트에 따라 나라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과 메소아메리카 계통에 속하는 삶의 방식에 뿌리내린 채 버티려는 사람들 사이의 영속적인 투쟁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는 서구의 문명 프로젝트에 따라 기획된 국가를 “상상의 멕시코”로,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뿌리내린 멕시코를 ”깊은 멕시코“로 이름 붙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멕시코는 겉으로 드러난 매끈한 ”상상의 멕시코“이기 쉽지만, 『깊은 멕시코: 부정당한 문명』은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우둘투둘한 ’멕시코들‘을 드러낸다. 멕시코의 공식적 역사 담론 이면에는 두 문명의 대립, 통합, 공존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이천 년부터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틀 안에서 발전해 온 수많은 사회는 16세기 초 서구 유럽 문명과 마주했고, 19세기 초까지 300년 동안 지속된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두 문명의 대립의 역사였으며,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을 거친 멕시코 현대사는 이들 문명의 통합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300년간의 식민 지배에도 소멸되지 않았고, 현대 멕시코의 문화적 통합 프로젝트에도 교체되지 않고 건재하다.
멕시코가 부정해 온 ”원주민적인 것“의 현존을 공표함으로써 저자는 자기 부정의 딜레마에 처한 한 나라의 실존과 마주한다. 식민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면, 탈식민화는 ”깊은 멕시코“를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탈식민화를 이루고자 했던 인류학자의 작업이 개인으로서든 사회로서든 오롯이 스스로 서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다.
상상의 멕시코가 부정했던 깊은 멕시코를 경유하여 오늘날의 멕시코를 읽는다.
치첸이차의 경이로운 건축에 매료되었다면,
토르티야의 맛을 음미해 보았다면,
백년초가 매달린 노팔과 용설란이 서있는 황량한 풍경이 궁금했다면,
알록달록 수놓인 전통 복색에 눈길이 머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아는 것이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 오늘날 멕시코 땅에 등장했다. 오늘날 멕시코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된 치첸이차, 테오티우아칸, 팔렌케 등의 유적지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메소아메리카 문명이 남긴 흔적이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문화들이 발전해 나갔다. 각각의 문화들은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 전시실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박제되어 우리 앞에 전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바로 지금 소칼로에서 춤추는 젊은이들도, 멕시코시티 남부 운하의 치남파에서 기르는 채소와 꽃도, 토르티야부터 엘로테까지 변신을 거듭하는 주요 식재료인 옥수수도, 오아하카주와 치아파스주 소도시에서 들려오는 원주민어도,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이어받고 그 문명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 있다.
많은 사회가 서구 유럽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을 왜곡하고 변형시켰다. 멕시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멕시코에 유럽인이 도착한 순간부터 서구 문명을 이곳에서 실현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었다. 19세기 초 독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경제적 엘리트의 관념 속 ‘상상의 멕시코’는,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손에 만져지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깊은 멕시코’를 부정했다.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타인에게 내 모습을 찾아 헤맨 것이 멕시코의 역사이다. 인류학자인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는 부정당하고 가려진 메소아메리카 문명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려준다. 500년 동안 부정당했지만, 자신이기를 멈추지 않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익숙해진 탈식민화 담론의 멕시코 버전이 아니다. 이 책은 정교한 이론을 전개하거나, 대단한 지성들과 어깨를 견주려는 분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멕시코의 원주민으로부터 ”배운 것을 더듬더듬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탈식민적 행위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과거와 현재를 읽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부단히 행동하는 인류학자의 모습까지 발견할 수 있다.